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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연ㅣ대중의 마음 정확히 명중시킨 고수 '길복순'

높은 완성도와 장르적 쾌감을 겸비한 장르물의 진화

'길복순', 사진제공=넷플릭스
'길복순', 사진제공=넷플릭스

니키타, 레옹,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존 윅. 킬러 액션 영화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이름들이다. 이제부턴 영화 속 대표 킬러 대열에 ‘길복순’의 이름을 추가해야 한다. 우마 서먼 주연의 ‘킬 빌’과 김옥빈 주연의 ‘악녀’는 왜 빠졌냐고 묻는다면, 이름보다 제목이 먼저 떠오르는 영화이기에 본문에서 별도 언급한다고 미리 말씀드린다. ‘길복순’은 킬러 영화, 그중에서도 여성 킬러 장르의 관습을 유쾌하게 비튼 작품으로 변성현 감독과 전도연 그리고 설경구의 만남이 치명적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이다. 

길복순(전도연)은 열일곱 살에 청부살인업계에 뛰어들어 지금은 A급 대우를 받는 최고 실력자다. 여느 직장인들처럼 소속된 회사가 있어 ‘직업 마인드’를 가지고 일하며, 특수 직종인 만큼 잦은 야간 업무 말고는 ‘직업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가정에선 혼자 키우는 딸 재영(김시아)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지만, 사춘기 자녀를 둔 엄마 길복순은 업계 선배이자 회사 대표 차민규(설경구)에게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이라고 토로한다. 
 
기존의 여성 킬러 영화 대다수가 주인공이 킬러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사랑과 복수에 초점을 맞췄다면, ‘길복순’은 대한민국에서 직장인, 가모장으로 살아가는 킬러의 이야기를 생활 밀착형 전개로 펼치면서 차별화를 선언한다. 현생 문제가 시급하니 주인공의 기구한 사연이나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는 데 러닝타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영화는 회사와 재계약 시점에 딸 문제로 고심하던 길복순이 ‘회사가 허가한 작품은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는 규칙을 어기면서 최종 대결장으로 향한다.

'길복순', 사진제공=넷플릭스
'길복순', 사진제공=넷플릭스

다섯 번째 장편 ‘길복순’을 넷플릭스 영화로 선보이는 변성현 감독은 이번에도 익숙한 장르 안에 자신의 스타일을 불어 넣어 목적을 달성한다. 로맨틱 코미디에 과감한 도발을 시도한 ‘나의 PS 파트너’(2012), 범죄 누아르를 멜로로 풀어 폭발적 팬덤을 낳은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 실화 바탕 정치 드라마에 상상력을 불어 넣은 ‘킹메이커’(2022)까지 변성현 감독의 영화는 빤해 보이는 장르 공식을 보란 듯 비켜갔다. 지금까지 변성현 감독의 연출작 중에서 현실과 가장 거리가 먼 ‘길복순’은 여성 킬러 영화에 현실감을 보태 실감 나는 K-장르물로 거듭난다. 기업 논리가 적용되는 킬러 사회, 딸을 사립학교에 보내고 교육 모임에 참석하는 킬러 엄마, 정치인 자녀의 입시 비리 문제까지 영화가 다루는 배경, 인물, 소재가 하나 같이 현실과 판박이다. 

‘길복순’은 여성 킬러 영화의 대표작인 할리우드 영화 ‘킬 빌’과 한국 여성 액션 영화 ‘악녀’(2017) 사이에 놓일 만한 영화다. ‘킬 빌’의 캐릭터와 구도를 떠올리게 하면서 교묘히 다른 고유 기술로 허를 찌른다. ‘악녀’가 정통 액션에 충실한 영화라면 ‘길복순’은 변칙과 반칙, 온갖 수단 방법을 총동원해 스타일리시한 액션 장면을 시원스레 뽑아낸다. 칭찬이다. 액션 시퀀스의 짜릿한 쾌감은 ‘존 윅’에 버금간다. 변성현 감독이 쓴 차진 대사의 향연, 감독과 이전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촬영, 조명, 미술, 음악감독까지 ‘변성현 사단’으로 자리매김한 제작진의 역량이 확연히 두드러진다. 

‘길복순’의 대사를 응용하자면 ‘이 작품은 전도연이 실패할 리 없는 작품’이다. 연기 경력 30년이 넘은 이 배우는 ‘밀양’(2007)으로 칸의 여왕이 된 이후에도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다져왔다. 세계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가 장르와 역할, 비중을 가리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 자체가 팬들과 동료, 선후배 배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길복순은 배우 전도연의 이력과 겹치는 감흥을 주며 모처럼 전도연의 베스트 캐릭터를 갱신한다. 

'길복순', 사진제공=넷플릭스
'길복순', 사진제공=넷플릭스

디테일이 살아 있는 전도연의 생활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열다섯 살 딸의 마음을 꿰뚫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티격태격 다투는 엄마 역할을, 직장에선 전설적인 선배 예우를 받는 킬러 역할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한다. 엄마와 킬러라는 이질적 조합의 간극을 전도연은 거리낌 없이 매운다. 전도연이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싶은 장면들이 점점 강도를 높이며 거대한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전도연이 아니었다면 길복순이라는 캐릭터가 이 정도로 뇌리에 각인될 수 있을까, 이런 액션이 과연 가능할까, 설경구와 엄청난 카메오 배우와 합이 이렇게 척척 맞아 들어갈 수 있을까, 안도와 기쁨이 동시에 든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과 ‘킹메이커’에 이어 변성현 감독과 세 번째 작업한 설경구는 이번에도 다른 감독의 작품에서보다 월등하고 독보적인 캐릭터를 구축한다. 청부살인업체 ‘MK ENT’를 운영하는 차민규는 길복순을 킬러의 세계로 이끈 인물로 ‘킬 빌’의 빌을 연상시킨다. 살인조직의 리더이자 주인공과 사랑으로 얽힌 인물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변성현 감독은 페르소나 설경구를 통해 사업가, 프로페셔널 킬러, 로맨티시스트 등 캐릭터의 입체감을 살리는 데 주력한다. 

길복순에게 한 없이 다정한 선배였던 차민규가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장면 연출은 박력감이 넘친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 장면은 변성현 감독 작품에서 설경구의 활약을 기대하는 팬들에게 만족감을 주고도 남는다. 설경구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배우를 향한 연출자의 애정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과욕을 부려 작품을 해치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 설경구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1)에선 연인으로, ‘생일’(2019)에선 부부 역으로 호흡을 맞춘 전도연과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고도의 연기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길복순', 사진제공=넷플릭스
'길복순', 사진제공=넷플릭스

변성현 감독은 차민규 외에도 여러 등장인물을 배치해 길복순의 인생을 적적하지 않게 만든다. ‘미쓰백’(2018)으로 주목받는 데뷔를 한 아역배우 김시아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십대 캐릭터에 힘을 싣고, 이솜이 MK ENT 이사이자 차민규의 여동생으로 등장해 ‘소공녀’(2018),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 ‘유령’(2023)에 이어 다채롭고 폭넓은 여성 캐릭터를 소화했다. 

구교환은 MK ENT 소속 킬러로 길복순의 후배이자 모종의 관계인 희성을 맡아 자유분방하고 귀에 쏙 박히는 입담 연기의 정수를 보여 준다. MK ENT 연습생 김영지 역을 맡아 강렬한 연기로 눈도장을 찍는 이연, 변성현 감독의 영화에 단골 출연해 매번 굵은 인상을 남기는 김성오, 길복순과 차민규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박세현과 이재욱 등 배우들이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각자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배우들의 고른 쓰임은 곧 영화의 만듦새와 직결된다. 

‘길복순’은 변성현 연출의 정점을 찍는 작품이다. 막힘없이 흐르는 전개와 신랄한 유머, 기대할 만한 액션까지 높은 완성도와 장르적 재미를 겸비해 2월에 열린 베를린영화제에서 먼저 호평받았고, 이제 곧 넷플릭스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열렬한 지지와 환영을 받을 것으로 예상한다. ‘길복순’에 열광한다면 속편의 여지도 있다. 극 중에서 존재만 언급된 두 명의 킬러, 독고할배와 사마귀가 길복순의 상대로 등판하는 2편이 만들어진다면 꽤 흥미로울 것 같다. 엔딩 크레디트 다음에 나오는 추가 영상을 보며 길복순의 새로운 파트너를 떠올려 봐도 좋다. 이렇게 나름대로 상상하고 즐겁게 만끽하며 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장르 영화를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한국 영화의 프로페셔널들이 의기투합해 최고 기량을 발휘한 ‘길복순’을 마음껏 즐기시라. 3월 31일 넷플릭스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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