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Credit 정수진(칼럼니스트)
  • 입력 2021.12.06 15:35
  • 댓글 0

정통과 퓨전 사이를 영민하게 오가는 ‘옷소매 붉은 끝동’

사진제공=MBC
사진제공=MBC

올해 방송가에 불어 닥친 ‘사극 열풍’은 많은 ‘역덕’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끝을 향해 내달리는 ‘연모’와 반환점에 다다른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극본 정해리, 연출 정지인)이 방영되는 지금은 흐뭇함을 넘어 황홀감을 느낄 정도다. 곧 공개될 ‘태종 이방원’과 ‘꽃 피면 달 생각하고’가 남아 있지만, 현재까지 가장 열정적인 반응을 얻은 작품은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보인다. 7화에 이르러 마의 시청률 10%를 넘긴 것이 그 인기를 증명한다. 

‘옷소매 붉은 끝동’(이하 ‘옷소매)은 영조~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조선 후반기의 성군인 영조와 정조는 그 업적도 업적이지만 드라마틱한 가정사를 지녀 대중매체에서 자주 다뤄지는 단골 인물들. 드라마 ‘이산’ ‘비밀의 문’, 영화 ‘역린’ ‘사도’ 등 단번에 기억나는 작품이 여럿이다. 바꿔 말해 이들은 색다르게 그려낼 여지가 적은 인물들이기도 하다. 가볍고 발랄한 터치를 가미하기엔 영조와 정조, 그리고 그 사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무겁기 때문. 77부작에 달하는 ‘이산’이 그나마 덜 무거운 편이었는데, ‘옷소매’는 진중할 땐 진중하되 무거움을 멀찍이 털어버린 유일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선택한 삶을 지키고자 한 궁녀와 사랑보다 나라가 우선이었던 제왕의 애절한 궁중 로맨스 기록’으로 설명되는 ‘옷소매’는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 이산(이준호)과 동궁의 지밀 나인이 되는 성덕임(이세영)의 로맨스에 방점이 찍혀 있다. 흥미로운 건 나인을 상징하는 옷소매의 붉은 끝동을 제목으로 삼을 만큼 성덕임과 궁녀의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풀어놓는 점이다. 궁녀에 대해 주목한 콘텐츠로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궁녀’처럼 궁녀를 주목한 콘텐츠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사극에서 궁녀는 이름을 지니지 못한 주변부의 인물. 그게 아니면 숱하게 영상화된 희빈 장씨나 ‘옷소매’와 동일한 실존 인물 의빈 성씨(성덕임)를 주연으로 삼은 ‘이산’처럼 후궁이 되는 궁녀에만 주목했다. 반면 ‘옷소매’는 견습 나인인 생각시부터 정식 나인, 상궁 등 다양한 연령대의 궁녀를 비추고 모시는 주인에 따라 처지가 휘둘리는 궁녀의 삶을 그리는 가운데, 궁녀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성덕임에 주목하는 점이 재미나다. 

사진제공=MBC
사진제공=MBC

실제 역사에서 정조의 유일한 승은후궁이 되는 의빈 성씨, 성덕임은 열다섯 어린 나이에 승은을 내리려 하는 세손을 완곡히 거절하고, 이후 15년이 흐른 뒤에도 후궁이 되길 거절했다 정조가 덕임의 아랫사람을 벌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후궁이 되는 인물이다. ‘왕의 여자’인 궁녀가 왕을 거절한다는 스토리텔링 자체가 독특한데, 의빈 성씨 사후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과 ‘어제의빈치제제문’ 등에서 의빈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토로해 보기 드문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손꼽힌다. 열다섯에 성덕임을 후궁으로 삼고자 했으니, 아마도 덕임은 이산의 첫사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드라마 ‘옷소매’는 그 풋풋함의 시대를 더없이 설레게 그려내는 중이다. 

주인공을 왕의 사랑을 거절하는 궁녀로 삼은 만큼 ‘옷소매’는 기존 사극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한 설정들이 여럿 등장한다. 아무리 어린 생각시였다지만 어린 덕임이 세손의 배동으로 착각한 이산에게 “세손저하의 배동이면 다야? 나도 나중에 정5품 상궁까지 될 수 있는 몸이야”라고 당차게 말하는 1화부터 서고에서 자료를 찾다 뒤로 넘어질 뻔한 덕임을 멋지게 잡아주는 대신 무심하게 짐짝처럼 툭 쳐서 던져 버리는 이산의 모습, 이산과 덕임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지는 가운데 감귤을 놓고 언쟁을 벌이는 장면 등 클리셰를 비틀어 놓는 이른바 ‘역클리셰’가 젊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 

로맨스 사극인 만큼 젊은 감성이 드라마를 전반적으로 지배하지만 ‘옷소매’는 정통 사극 못지 않은 고증으로 기존 사극 마니아들도 깊이 만족시킨다. 무분별한 ‘마마’ 대신 ‘자가’ ‘마노라’ 등 제대로 된 인물에 대한 호칭, 섬세한 의상과 소품 등이 깐깐한 시청자들의 눈에 합격점을 받고 있다. 재미를 중시해 극적으로 표현했던 일부 실존 인물들에 대한 해석도 비교적 실록에 입각해 객관적으로 보인다. 영조와 수십 년의 나이 차이를 지닌 계비 중전 김씨(장희진)에 대한 묘사가 그러한데, 실제 정조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고 중립적이었던 것으로 기록된 정순왕후 김씨를 ‘옷소매’는 충실히 표현한다(덕분에 드라마 ‘이산’을 재미나게 봤던 이들은 혼란을 겪는 중). 

사진제공=MBC
사진제공=MBC

무엇보다 ‘옷소매’의 흡인력은 역시 출연진의 맛깔나는 연기로 완성된다. 데뷔 때부터 연기 논란이 없었던 이준호와 20년 넘는 연기 경력과 수많은 사극을 경험한 이세영의 진중함과 발랄함의 간극을 순식간에 오가는 안정된 연기는 거듭 칭찬을 던져도 모자라다. 사극에서는 신선한 얼굴인 서상궁 역의 장혜진과 혜빈 홍씨 역의 강말금, 젊지만 무게감 있는 중전을 잘 소화하고 있는 장희진, 덕임과 더불어 궁녀의 삶을 제대로 묘사하는 제조상궁 역의 박지영도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영조 역의 이덕화에게 반해 있다. 누군가는 드라마 ‘이산’에서 영조를 맡았던 이순재가 최고라고 하지만, 변덕스럽고 괴팍하면서도 편집증적인 영조의 모습을 그려내는 이덕화를 보고 있노라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사랑하는 여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그 아들의 아들인 손자를 더없이 사랑하면서도 폭주할 때면 서슴없이 손자의 귀싸대기를 갈기는 광증의 영조를 이덕화만큼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다. 

작품성과 화제성을 동시에 잡으며 사랑 받는 중인 ‘옷소매 붉은 끝동’은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고, 어떤 터치를 가미하여 농담을 조절하느냐에 따라 잘 알려진 시대의 잘 알려진 인물들을 그림에도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반환점을 돌면서 긴장감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 한국 드라마지만, 8화까지 방영한 지금 긴장감이 1도 떨어지지 않은 것을 보면 이 드라마가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 자못 기대가 된다. 

 

저작권자 © 아이즈(iz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