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크러시 콘셉트│① 걸그룹 제작하기 어렵다

2018-11-20     박희아
“요즘에는 ‘걸크러시’를 작곡 키워드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작곡가 A씨의 말이다. A씨 외에도 여러 작곡가들은 입을 모아 “지금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걸그룹들 중에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보다 ‘걸크러시’가 많아서 그걸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예쁘고 멋진 여성들이라는 이미지로 인기를 끈 블랙핑크는 ‘뚜두뚜두’에서 화려한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으로 총을 쏘는 안무를 보여줬다. 청순한 콘셉트로 사랑받았던 에이핑크는 7년 만에 처음으로 섹시하고 당당한 여성의 이미지를 강조한 ‘1도 없어’로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구구단은 영화 ‘오션스8’의 이미지를 차용, 저돌적인 여성 캐릭터를 살린 ‘Not That Type’으로 컴백했다. 심지어 ‘여자는 쉽게 맘을 주면 안 돼’라는 가사 등으로 소극적인 여성상을 표현하던 트와이스조차도 “새로운 트와이스”라며 기존보다 큼직큼직해진 동작 위주의 ‘Yes Or Yes’ 안무를 내놓았다. 올해 데뷔와 동시에 1위를 차지한 (여자)아이들과 아이즈원의 데뷔곡 또한 귀엽거나 청순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지난 5월, (여자)아이들의 소속사 큐브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시크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지, 걸크러쉬처럼 센 콘셉트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걸크러시’로 보일 만한 이미지는 보여주지만, 이른바 ‘너무 센’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는 부담감을 느낀다. 작사가 B씨는 “아무리 ‘걸크러시’를 살려달라고 요청이 와도, 여전히 대부분 키스, 뽀뽀, 사랑, 스킨십 같은 직접적인 단어는 쓰지 말아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위키미키의 ‘Crush’는 이런 애매한 상황에 놓인 걸그룹의 현재를 보여준다. 뮤직비디오 첫 장면에서부터 오토바이를 타는 여성을 등장시키며 강렬한 느낌을 주려 하지만, 정작 가사에서는 ‘더 늦기 전에 다가가서 먼저 말해볼래’가 가장 적극적인 애정 표현이다. 트와이스의 ‘Yes Or Yes’도 당찬 여성상을 주장하지만, ‘조금 쉽게 말하자면 / 넌 뭘 골라도 날 만나게 될 거야’(트와이스 ‘Yes Or Yes’)처럼 먼저 고백하는 상황 자체를 표현하는 데 그친다.

몇몇 관계자들은 “걸크러시가 인기를 얻고 있다”는 분석 자체가 착시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11월 중순 현재, 음원 사이트 멜론의 실시간 차트 50위 안에 든 걸그룹, 혹은 걸그룹 멤버는 블랙핑크의 제니, 트와이스와 아이즈원뿐이다. 작곡가 C씨는 “지금 차트에 있는 걸그룹들은 모두 소속사 팬덤이 크거나, 유명 프로그램 출신이다. 걸크러시 콘셉트 때문이 아니라 원래 인지도가 높은 거라고 봐야 한다. 트와이스의 ‘Yes Or Yes’가 엄밀히 따지면 걸크러시는 아니지 않나”라고 말했다. 작곡가 B씨도 “해외 팝스타나 영화 속 클리셰를 따라 하느니 아예 청순한 콘셉트나 섹시한 콘셉트처럼 확고하게 자기 팀의 색을 갖추는 게 장기적으로는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걸크러시’ 콘셉트의 효용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A씨는 “지금 10대들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의 멋진 여성 팝스타들을 구경한다.”며 “‘걸크러시’ 곡은 기본적으로 힙합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잘 소화하면 멋진 느낌을 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YG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블랙핑크는 굉장히 유리한 셈”이라고 말했다. YG 엔터테인먼트라는 대형 기획사에서 데뷔했고, 동시에 힙합 레이블이라는 인식이 강한 회사에서 나온 걸그룹이기 때문에 소위 ‘진정성’을 어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어 작곡가 A씨는 “억지로 멋있는 여자를 연기하는 것은 한국 래퍼들이 미국 래퍼들을 어설프게 따라 해서 비웃음을 사는 것과 같은 역효과를 낳는다”며 마마무를 ‘걸크러시’의 좋은 예로 꼽았다. “한국에서 자란 연습생들이 대다수 포함된 걸그룹들이 해외 팝스타의 느낌을 내기란 어렵다. 이미 대중이 유튜브로 그 느낌을 익히 접한 상황에서 스웨그 스타일을 시도하기보다, 오히려 무대에서 흥에 겨운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걸크러시’에 가깝다.”고 말했다. ‘걸크러시’란 단지 무대 의상이나 곡의 분위기 같은 것 이전에 마마무처럼 소비자들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팀 전체의 분위기 또는 태도가 제대로 나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 점에서 지금 한국의 제작사들 중에 ‘걸크러시’의 개념을 명확하게 무엇이라 정의하고 기획하는 회사가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다.

‘걸크러시’를 둘러싼 한국 대중음악 산업의 흐름은 제작자들이 요즘 걸그룹 제작을 과거보다 더욱 어려워하는 이유다. 걸그룹 프로듀서 D씨는 “차라리 청순, 섹시, 큐트같이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걸그룹이 많을 때가 각자의 개성이 있어서 오히려 나았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지금은 어떤 콘셉트를 내도 성공이 쉽지 않을뿐더러, 유행하는 ‘걸크러시’를 들고 나오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걸크러시’의 타깃 소비자층인 여성들이 어디에 반응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성 프로듀서 또는 제작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은 한국 대중음악 산업의 현실도 영향을 미친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되면 한 가지 콘셉트를 줏대 있게 밀어붙여볼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획사는 극히 적다. 일단 차트에서 제일 흥행하는 스타일을 시도해보게 된다.” 제작자 E씨의 말은 지금 데뷔를 앞두고 있는, 혹은 데뷔한 수많은 걸그룹들이 팀의 색깔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D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일단 차트에서 흥행하는 트와이스나 블랙핑크처럼 하되, 회사 능력 선에서 되는 만큼, 운이 따를 수 있다.” 소비자의 요구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변화는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반면 아직 그에 대한 준비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준비해온 것을 그만둘 수도 없다. 많은 걸그룹 제작자들이 이렇게 한숨을 쉬는 이유다. “걸그룹 제작,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