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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edit 정수진(칼럼니스트)
  • 입력 2022.06.28 13:51
  • 수정 2022.06.2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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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호, '대체불가한 존재감'이란 바로 이런 거다

'왜 오수제인가'서 지독한 악역 포스로 시청자 매료시켜

사진제공=스튜디오S, 보미디어
사진제공=스튜디오S, 보미디어

언제부턴가 안방극장에서 허준호를 만나는 일이 많아졌다. 출연 빈도수로만 느껴지는 건 아니다. 존재감 때문이다. 허준호의 굵고 깊게 패인 주름과 형형한 눈빛을 보면 방황하던 리모컨을 절로 내려놓게 된다. 존재감을 인간으로 구현한다면 허준호 같은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 

생각해 보면 허준호는 언제나 분량에 상관없이 강한 존재감을 발산했다. ‘젠지’들은 잘 모르겠지만 첫 1000만 한국영화 ‘실미도’에서 짠한 장면 중 하나는 사탕봉지를 떨어트린 채 달려가 “(쟤들) 무장공비 아닙니다!”를 외치던 허준호의 모습이었다. 드라마 ‘주몽’의 초반 인기의 견인차 역할을 한 이도 ‘허셀 크로’란 별명을 얻었던 해모수 역의 허준호였고. 그 이전에도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보여준 ‘젊은이의 양지’의 황윤배, 반대하는 예비 장모마저 웃음을 짓게 하던 넉살 좋은 안무가로 분한 ‘보고 또 보고’의 박기풍, 한쪽 눈에 의안을 박고 이순신 장군을 부르짖던 ‘왕초’의 발가락 등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던 역할이 하나둘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허준호가 다시 눈에 들어온 건, 공백기 때문이다. 2007년 드라마 ‘로비스트’와 특별출연한 영화 ‘이끼’ 이후 꽤 긴 시간 동안 허준호를 TV나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다. 그러다 2016년 드라마 ‘뷰티풀 마인드’로 다시 연기를 시작하고, 그 이후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온몸에 문신을 새긴 전설적인 건달로 특별출연한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은 허준호 제2의 전성기의 시작을 예고했다. 드라마 ‘군주-가면의 주인’과 ‘이리와 안아줘’의 악역으로 장면장면을 장악하더니,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 시리즈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안현대감을 연기해 말 그대로 전 세계를 홀렸다. 좀비가 되어서도 기백 넘치는 모습으로 달려들어 악의 축을 물어뜯는 모습은 전율 그 자체였다는 평이 뒤따른다. 

오랜 공백기 동안 쌓인 연기에 대한 갈망을 메우려는 듯, 돌아온 허준호는 영화와 드라마 양쪽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는 반전을 지닌 그의 존재로 탄탄한 긴장감을 끝까지 가져갈 수 있었고,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는 장영실 역의 최민식과 세종 역의 한석규, 투톱 사이에서 강직한 조말생 역을 맡아 오롯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영화 ‘모가디슈’의 북한 대사 림용수는 경험과 연륜이 쌓인 노회한 카리스마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캐릭터. 절체절명의 순간 신념을 뒤로 하고 대사관 식구들을 구해야 하는 고뇌를 훌륭히 표현하며 청룡영화상, 부일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의 남우조연상을 휩쓸었고, 이로 인해 1960~70년대 대표적인 성격파 배우였던 아버지 허장강과 함께 부일영화상 최초의 부자(父子) 수상자가 되는 기록도 남겼다. 

사진제공=스튜디오S, 보미디어
사진제공=스튜디오S, 보미디어

SBS에서 방영 중인 ‘왜 오수재인가’에도 허준호가 나온다. ‘왜 오수재인가’는 높은 시청률과는 별개로 다소 엉성하고 허술한 설정과 전개로 의아함을 자아낸다. 이 의아함을 극복하고 드라마에 개연성을 불어넣는 건 타이틀롤 오수재를 맡은 서현진의 연기. 그리고 서현진과 대척점에 서서 묵직한 긴장을 일으키는 허준호에게 공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허준호가 연기하는 TK로펌 최태국 회장은 고졸 출신 여성 변호사라는 약점을 지닌 신입 변호사 오수재를 지금의 독하디 독한 스타 변호사로 올라서게 원동력을 준 인물. 똘똘한 오수재를 온갖 궂은 일을 해결하는 설거지꾼으로 부리면서도 상황에 따라 절벽 끝으로 내몰고, 또 한순간에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키려고 하는 등 최태국 회장은 상황 판단도 빠르고, 태세전환에 능숙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기준이 확고한 인물이다. 한수그룹 한성범 회장(이경영)과 대선 후보인 이인수 의원 밑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허황된 움직임으로 부산한 두 사람과 달리 최태국은 언제나 의연하다. 골프장 연못의 물을 퍼내고 바닷물을 채워 활어 낚시를 하는 아이디어를 낸 최태국이 미끼를 문 낚싯대에 호들갑을 떠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눈빛을 보면 누가 우위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왜 오수재인가’의 최태국이 흥미로운 것은, 마냥 눈빛에 힘을 주고 저음의 목소리로 묵직함을 마구마구 드러내는 드라마 속 흔한 권력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색깔을 지녔기 때문. 공중목욕탕에서 자신에게 보고 및 부탁을 하러 오는 협조자들에게 빨대 꽂은 요구르트를 신뢰의 한 조각인 듯 쥐어주고, 비밀 서재에서 새우깡과 오징어땅콩 같은 친근한 과자에 깡소주를 마시는 자수성가형 권력자인 최태국은 허준호를 만나 조화를 이룬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었을 것 같은 최태국과 얼굴의 주름만으로 캐릭터에 서사를 담아낸다는 허준호의 근사한 시너지다. 

요구르트를 쪽쪽 빨다가도 “내 돈 받는 내 사람들은 내가 시키는 일은 뭐든 해야 하는 거다. 그게 내 세상 룰이야”라며 공기마저 찍어 내리는 듯 압박감을 선사하는 최태국. 8화까지 방영된 ‘왜 오수재인가’에서 오수재를 쥐락펴락 했던 최태국이 어떤 최후를 맞을지, 그리고 그 최후를 허준호가 어떻게 그려낼지, 그 궁금함으로 남은 8화를 지켜볼 생각이다. 대체불가한 존재감이란 이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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