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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중심추를 놓치지 않는 배우, 장혁

사진제공=지앤지프로덕션
사진제공=지앤지프로덕션

KBS2 월화드라마 '붉은 단심’(극본 박필주, 연출 유영은)에서 좌의정 박계원으로 나오는 장혁의 모습은 조금 낯설다. 사극에서 장혁은 민초의 인물을 맡을 때 두드러졌다. ‘추노’의 이대길을 비롯해 ‘뿌리깊은 나무’의 ‘똘복이’ 강채윤, ‘장사의 신-객주 2015’의 천봉삼 등이 그랬다. 물론 영화 ‘순수의 시대’와 드라마 ‘나의 나라’의 이방원,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왕소처럼 왕의 역할을 맡은 적도 있지만 이방원이나 왕소는 능동적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인물이었다. ‘붉은 단심’의 박계원은 반정을 주도한 정국공신으로, 노회하게 판을 뒤집을 줄 아는 정치인. “언년아~!”를 외치던 추노꾼의 모습과는 백팔십도 다른 모습이다. 

‘붉은 단심’의 주인공인 왕 이태(이준)는 조선시대 11대 왕 선종의 적장자로 나온다. 실제 조선시대 11대 왕은 중종이고, 12대 왕인 인종의 이름은 이호이니 가상의 왕이 주인공인 셈. 하지만 실제 역사와 얼개는 흡사하다. 드라마 속 선종이 박계원을 비롯한 공신들의 반정으로 인해 형을 끌어내리고 즉위한 것은 진성대군이었던 11대 왕 중종이 연산군 대신 왕으로 추대된 것을 떠올리게 하고, 중종에 이어 아들인 인종까지 약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을 생각하면 ‘붉은 단심’의 이태와 흡사하다. 자연 장혁이 맡은 박계원은 중종반정의 실질적 주인공이었던 박원종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장혁은 현대극에서도 그랬지만 사극에서 유독 두드러진 존재감을 발휘했다. ‘추노’의 대길이나 ‘뿌리깊은 나무’의 강채윤이 대표적인데, 이들 작품에서 장혁의 존재는 대체로 선역의 포지션에 속한 주인공이었다. 선역이 아니더라도 그 행동에 당위성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리고 액션. 장혁이 맡은 인물들은 대체로 누구를 지키기 위해서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든 무예가 뛰어난 경우가 많았다. 자연 장혁은 사극 액션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 배우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붉은 단심’의 박계원은 박원종을 모델로 했다는 가정이라면 무신 출신일 테지만 현재 좌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른 만큼 직접적으로 액션을 펼칠 기회는 드물다. 게다가 주인공인 왕 이태와 그의 정인인 유정(강한나)의 정적으로 등장하는 만큼 박계원은 이 드라마의 ‘빌런’이다. 존재감은 여전하지만 주인공도 아니고, 그간 장혁이 맡아온 인물과는 사뭇 달라진 궤적이다. 

사진제공=지앤지프로덕션
사진제공=지앤지프로덕션

1화에서 박계원은 공신 세력의 딸과 혼인하길 거부했던 세자 이태를 폐세자의 기로까지 내몰 만큼 절대권력을 자랑한다. 그 어마어마한 힘의 차이를 실감한 세자가 살아남고자 그들의 간택한 처녀와 혼인할 것이라며 사실상 투항했음에도 “저하, 국혼은 거래 물품이 아닙니다”라며 세자를 누르고, 어찌하면 되느냐는 세자의 되물음에도 “신하는 고할 뿐, 모든 결정은 주상전하의 뜻이옵니다”라고 고고한 반응을 보인다. 결국 그 앞에 세자가 무릎을 꿇고 나서야 “저하는 이 나라의 국본이십니다. 국본이 어찌 머리를 숙이십니까?”라고 나무라며 함께 자세를 낮출 만큼 왕권을 쥐락펴락 하는 인물. 

왕권을 압박할 만큼 절대권력을 자랑하는 사극 속 빌런들은 항상 있어왔지만 대체로 그들은 자신과 가문의 권력을 최우선으로 치는 탐욕스러운 인물이었다. 일차원적인 욕망이 강한 납작한 캐릭터가 많았다는 말이다. 물론 정치적 노선이 달랐던 ‘용의 눈물’의 정도전(김흥기)이나 압도적 존재감을 기품 있게 표현한 ‘정도전’의 이인임(박영규) 같은 인물도 있었지만 로맨스 사극이나 팩션 사극이 많아지면서 묵직한 사극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면서 빌런 포지션의 인물에게 입체성을 불어넣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붉은 단심’의 박계원은 반정을 통해 폭군을 폐위시킨 인물로, 자신만의 뒤틀린 명분으로 후대에도 권력을 틀어쥐려 한다. 그를 위해서라면 연모하던 연인 최가연(박지연)을 주상의 간택 후궁으로 밀어 넣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비정하되 대비가 되어 자신의 정치적 동지가 된 가연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연민이 서려 있는, 복잡다단한 인물. 

왕을 폐위시키고 왕을 쥐락펴락하면서도 왕위를 탐하지는 않는 묘한 나라에 대한 충정, 자신의 질녀를 중전으로 올릴 심산으로 오랜 시간 준비했다가도 왕의 틈을 발견하곤 잽싸게 왕의 숨겨진 정인 유정을 손에 넣어 자신의 질녀로 바꿔치기하는 판단력, 유정이 가짜 질녀임을 탄로날 수 있음을 알고도 오히려 왕에게 결정을 들이밀 수 있는 과감함 등 어느 면에서는 왕인 이태보다 더한 무게감과 기품을 엿볼 수 있는 인물인 박계원은 분명 흥미롭다. 그리고 그 흥미로움은 이태와 유정의 관계 이상으로 극에 긴장감을 불어 일으키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사극에서 항상 빛을 발했던 장혁의 묵직한 연기 톤과 카리스마가 한층 농축되어 시너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고. 

점점 사극의 주인공이 젊어지면서, 장혁도 ‘나의 나라’와 ‘붉은 단심’에서 선두에 서는 주인공을 놓았다. 그러나 ‘나의 나라’에서도 그랬고, ‘붉은 단심’에서도 장혁은 결코 중심추를 놓치지 않는다. 특유의 울림 있는 목소리 톤으로 연기 톤이 비슷하다는 일각의 평도 있었지만 매번 장혁은 각자의 캐릭터에서 저마다의 서사를 쌓는데 충실했다. ‘붉은 단심’의 박계원은 입체적인 캐릭터를 쌓는데 충실했던 장혁 연기 인생의 분기점이 되어줄 것으로 보인다. 6회까지 보여준 얼굴만도 여럿인데, 앞으로 이태와 유정과 대립하며 노회하게 판을 짜며 보여줄 시시각각의 얼굴들은 얼마나 더 입체적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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