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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어: 세상을 향한 함성’, 니콜 키드먼이 참여한 여성판 '블랙 미러'

애플 TV+의 야심찬 여성 서사 드라마 시리즈

‘로어: 세상을 향한 함성’,, 사진제공=애플TV+
‘로어: 세상을 향한 함성’,, 사진제공=애플TV+

‘파친코’ 끝나면 뭘 볼까. 애플 TV+가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로 배팅에 성공하며 새로운 시청자들을 끌어들였다. 오는 29일 ‘파친코’ 마지막 8화 에피소드 공개를 남겨둔 지금, 애플의 다른 오리지널 시리즈에 눈길을 돌리는 중이라면 블랙 코미디 ‘로어: 세상을 향한 함성’을 추천한다. ‘파친코’처럼 전형적인 자세를 거부하고 전복적인 태도로 여성의 삶을 이야기 하는 이 드라마 시리즈는 8개 에피소드 전체를 공개했고, 옴니버스 형식에 개별 러닝타임도 30분 분량이어서 한 편씩 또는 몰아보기에도 부담 없다. 

한국어 부제가 친절하게 소개하듯 ‘로어: 세상을 향한 함성’은 여성 서사를 다룬 드라마 시리즈다. 에피소드마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까진 그럭저럭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이 시리즈의 모양새가 SF 드라마 시리즈 ‘블랙미러’와 닮았다면 흥분 지수가 급상승한다. 코미디와 냉소를 오가고 미스터리와 환상을 넘나드는 기묘한 이야기는 멀게는 1980년대 미스터리 드라마 시리즈 ‘환상특급’을, 가깝게는 ‘블랙미러’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환상특급’보다는 온화하고 ‘블랙미러’보다는 SF 요소가 적지만, 여성들이 직면한 현실 문제를 인기 장르 화법으로 풀어내 시너지 효과를 낸다. 

신박한 여성 드라마 시리즈 ‘로어: 세상을 향한 함성’을 기획한 이들은 여성 레슬링 선수들의 도전을 그린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글로우: 레슬링 여인천하’의 기획과 책임 프로듀서를 맡았던 칼리 멘시, 리즈 프러아이브다. 두 사람이 ‘로어’의 총괄 제작과 공동 책임을 맡았고 원작자 세실리아 아헌, 할리우드 스타 니콜 키드먼 등이 총괄 제작에 참여했다. 에피소드 연출에는 일곱 명의 감독이 참여했는데, 한국계 미국인 김소영 감독이 에피소드 3과 에피소드 8 두 편의 연출을 맡아 눈길을 끈다. 출연 배우들은 니콜 키드먼을 비롯해 ‘글로우’ 시리즈의 스타  알리슨 브리와 베티 길핀,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약하는 배우 잇사 레이와 미라 사이얼, 가수로 활동하는 신시아 에리보와 피벨 스튜어트, 넷플릭스 시리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메릿 웨버, ‘문라이즈 킹덤’의 카라 헤이워드까지 다재다능한 여성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섰다.  

사진제공=애플TV+
사진제공=애플TV+

각 에피소드는 ‘000한 여자(소녀)’라는 제목이어서 흥미를 돋운다. 말 그대로 드라마 내용을 담은 직관적인 제목이고, 주제로 음미해 보면 꽤 은유적인 제목이다. 에피소드 1 ‘사라진 여자’는 자서전을 집필해 성공한 작가 완다(잇사 레이)가 책의 영화화 논의를 위해 LA 출장을 와서 흑인 여성이기에 겪는 일련의 차별을 서늘한 블랙 코미디로 그렸다. 대표적인 여성 영화들을 언급하며 ‘가벼운 백인 여자애들 자서전’이라고 꼬집는 대사가 신랄하다.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 에피소드 2 ‘사진을 먹은 여자’는 치매를 앓는 노모를 집으로 모시기 위해 본가에 간 딸이 우연히 가족 앨범을 발견하고 기이한 체험에 빠져드는 이야기다. 엄마와 딸이라는 역할과 책임에 갈등하는 중년 여성의 억압된 심리뿐만 아니라 모녀 관계, 여성 연대를 밀도 있게 그린 에피소드다. 호주를 대표하는 대배우 주디 데이비스와 니콜 키드먼의 명품 연기를 한 작품에서 볼 수 있고, 니콜 키드먼이 일상복 차림으로 등장해 평범한 여성을 연기하는 생소한 모습도 이채롭다. 

‘글로우: 레슬링 여인천하’를 애청했다면 베티 길핀과 알리슨 브리가 주연을 맡은 에피소드에 관심이 쏠릴 것이다. 베티 길핀은 에피소드 3 ‘선반에 진열된 여자’에서 성공한 남성의 아름다운 아내를 일컫는 ‘트로피 와이프’를 연기했고, 알리슨 브리는 에피소드 6 ‘자신의 살인 사건을 해결한 여자’에서 엽기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살해한 범인을 찾아 나서는 젊은 여성으로 출연한다. 각각 경력 단절 여성과 여혐 범죄 피해자를 희화화한 캐릭터임에도 코미디 ‘글로우’에서 진가를 드러낸 두 배우의 페이소스 연기가 뒷받침되어 독특한 캐릭터가 탄생했다. 두 에피소드는 남편 역의 대니얼 대 킴,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역의 휴 댄시와 ‘글로우’에 출연한 크리스토퍼 로웰 등 남자배우들이 역할이 두드러진다. 

사진제공=애플TV+
사진제공=애플TV+

이 외에도 출산 후에 복직한 워킹맘이 겪는 직장 내 성차별과 산후 우울증을 호러로 묘사한 에피소드 4 ‘몸에서 잇자국을 발견한 여자’, 가스라이팅에 관한 우화인 에피소드 5 ‘오리에게 잡아먹힌 여자’, 황혼 이혼을 코믹하게 그린 에피소드 7 ‘남편을 반품한 여자’ 등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이 녹아들어 모든 에피소드가 공감대를 형성한다. 

에피소드 8 ‘말을 사랑한 소녀’는 여덟 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가 배경이고 제목도 여자가 아닌 소녀다. 서부개척시대를 무대로 아버지의 복수에 나선 소녀(피벨 스튜어트)와 그를 돕게 된 친구(카라 헤이워드)의 이야기는 소녀들의 연대를 그린 서부극이어서 흥미롭게 읽힌다.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서부극은 최근 걸출한 여성 감독들이 다시 쓰는 장르로 재조명받고 있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2021), 제인 캠피온 감독의 ‘파워 오브 도그’(2020)가 대표적. 이들 영화의 주인공들이 유대인과 동양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인물들임에도 남성인 반면에, 김소영 감독이 연출한 이 에피소드는 기존 서부극이라면 단역으로도 등장하기 어려웠을 소녀 캐릭터에 목소리를 부여한다. 가진 것 없는 시대에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선의를 위해 나설 줄 알며 성인 남성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주인공들은 젊은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두 소녀가 여성 보컬의 힘찬 함성으로 짜인 드라마 오프닝 주제곡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장면은 여성들을 응원하는 안무처럼 느껴진다. 남성성을 상징하는 장르를 젊은 여성들의 성장 서사로 전복시킨 이 참신한 서부극은 마지막 에피소드에 자리해 긴 여운을 남긴다. 

‘로어: 세상을 향한 함성’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한바탕 우여곡절을 겪고 스스로 답을 찾는다. 장르 색이 강한 드라마여서 열린 결말이나 등골 서늘해지는 신박한 엔딩을 기대했다가 서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시리즈가 일부러 애써 완결된 이야기로 끝맺음하려는 의도를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세상을 향한 여성들의 외침이 메아리에 그치거나, 뜨겁게 달군 화두가 일순간의 기교에 눌려 차게 식을까 우려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쐐기처럼 박는다. 인종, 피부색, 출신 배경, 나이, 성별에 대한 차이를 극복하고 주체성, 정체성을 회복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크고 깊은 울림을 전한다. 포효와 같은 이 여성 드라마의 기세는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왕이면 이 시리즈에 기운과 영감을 받은 한국 여성 콘텐츠들이 잔뜩 쏟아지기를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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