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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edit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 입력 2021.09.29 10:02
  • 수정 2021.09.2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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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힙합의 뿌리 '듀스' 김성재를 추억하다

김성재, 사진출처=앨범재킷
김성재, 사진출처=앨범재킷

"이제 우리가 시작하겠어 바로 여기서 D, E, U, X DEUX! 여기서 우린 보여주고 싶어 D, E, U, X DEUX! DEUX..." - '나를 돌아봐' 중에서

그것은 선언이었다. 자신들이 이 바닥을 전복(또는 정복)하겠다는 외침이었다. 물론 그것은 자기들이 곧 한국 가요계의 혁명(Revolution)이라는 확신이기도 했다. 이 당돌한 자기 소개 이후 40초 동안 펼쳐지는 힘찬 브레이크 댄스는 1년 전 서태지와 아이들을 경험한 그때 청소년들의 가슴을 몇 배는 더 뛰게 했다. 둘은 무형의 음악을 유형인 몸으로 지탱했고, 비틀리고 구부러진 몸으로 그 음악에 맞섰다. 그들은 당대 10대들의 또 하나 영웅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들은 신화가 되었다.

이현도와 김성재. 두 사람은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함께 춤을 추고 다니며 가까워졌다. 특히 이현도는 허비 행콕과 마이클 잭슨, 런 디엠씨와 퀸시 존스로부터 음악 다루는 방법도 따로 터득하던 때였다. 어린 시절을 줄곧 일본에서 보낸 김성재에게 그런 이현도는 친형제나 다름 없었다. 아니, "현도를 보면 숨어 있는 또 다른 나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둘은 형제를 넘어 어쩌면 소울메이트에 더 가까웠을지 모른다. 2년 뒤, 어느새 이들에겐 '춤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춤깨나 추게 된 두 사람은 박남정과 현진영, 양현석과 이주노가 드나들었던 이태원 '문나이트' 클럽에 가 현장 경험을 한다. 여기서 만난 현진영의 백댄서 듀오 '와와'의 강원래, 구준엽이 입대하며 마침내 이들에게도 기회가 왔다. 이현도와 김성재가 새로운 와와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들리는 후문에 따르면 현진영 측에선 사실 김성재만 원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스타일과 춤실력에서 김성재가 이현도를 압도했다는 얘기겠다. 

그래도 이현도에겐 작사, 작곡, 프로듀싱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그는 남의 노래 대신 나의 노래를 만들고 부를 수 있었기에 역사가 됐다. 각자의 세계관이 뚜렷했던 둘은 결국 와와를 벗어나 자신들만의 음악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오디오를 책임졌던 이현도와 비디오를 책임졌던 김성재는 그렇게 고전 경제학의 대표 가치인 '분업'을 십분 활용해 한국 대중음악계에 '진짜' 힙합의 그림자를 좀 더 빨리 드리울 수 있었다.

팀 이름은 단순했다. 그것은 그저 두 사람의 존재 자체를 가리킬 뿐이었다. 듀스. 처음엔 영어 투(Two)로 가려다 불어 쪽 느낌이 더 마음에 들어 둘을 뜻하는 듀(Deux)를 영어식으로 읽었다. 사실 이들은 계속 와와로 활동하려 했지만 현진영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듀스를 쓰게 된다. 결과적으론 다행인 선택이었다.

1992년 4월, 한해 먼저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랩이라는 걸 한국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그 랩을 제대로 한 건 듀스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서태지와 아이들이 K2 소총 수준의 랩을 들려줬다면 듀스의 랩은 영화 '터미네이터 2'에 나왔던 M134 미니건 수준의 화력을 뿜었다. 버벌 진트와 피타입 이전 '한국어 랩'의 가능성, 방법론을 제시한 듀스는 그러나 리믹스 음반까지 스튜디오 앨범 4장만 남기고 2년 여 활동 끝에 공식 해체하고 만다. 운명이었는지 이듬해 1월엔 서태지와 아이들도 해체하면서 팬들을 놀라게 했는데, "창작의 고통" 때문에 갈라섰다는 서태지 측과 프로듀서 및 엔터테이너로 개인의 미래를 설계한 듀스 측의 "작전상 해체"는 그 본질에서 달랐다. 듀스는 해체를 공언한 그해 7월 15일부터 이틀 동안 굿바이 콘서트를 열었고(3일간 4만5,000 여 팬들이 모여들었다) 김성재는 4개월 뒤 이현도보다 먼저 솔로로 데뷔 무대를 치른다.

사진출처=SBS '인기가요20' 방송화면 캡처
사진출처=SBS '인기가요20' 방송화면 캡처

11월 19일 일요일, SBS '생방송 TV 가요 20'에 출연한 김성재는 이현도에게 받은 '...말하자면'을 들려줬다. 곡은 구본승의 '너 하나만을 위해'에서 지누션의 '말해줘', 유승준의 '열정'으로 이어질 뉴 잭 스윙 비트와 그루브를 지닌 것이었다. 여기에 아이스하키복을 응용한 무대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선 김성재는 시원시원한 안무 뿐 아니라 '듀스의 스타일리스트'로서 패션 감각까지 마음껏 뽐냈다.(김성재는 생전에 모친과 동생의 코디까지 챙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승에서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방송을 끝내고 동료들과 머물러 간 호텔에서 다음날 새벽 싸늘한 주검이 되어 나온다. 처음엔 돌연사, 이후엔 의문사로 남는 전대미문의 연예인 사망 사건이었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던 그의 죽음에 누구보다 비통해 한 이현도는 1996년 솔로작 'Do It'에 '친구에게'를 실어 김성재를 추모했다. 김성재와 가까이 지냈던 재즈 록 밴드 봄여름가을겨울도 자신들의 6집 '바나나 쉐이크'에 담은 '비'라는 곡으로 후배의 부재를 슬퍼했고, 생전에 고인을 아꼈던 신승훈 역시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을 부르며 떠난 김성재를 추억했다.

당시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 사건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표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수많은 말들이 있었고, 사건 피의자로 지목된 인물과 유족 사이 치열한 공판 끝에 징역과 무죄가 엎치락뒤치락 했다. 그래봤자 죽은 사람은 돌아올 리 없었으니 팬들에겐 진실을 밝히려는 쪽도 결백을 증명하려는 쪽도 허망해보이긴 마찬가지였을 터다.

그리고 2021년 8월 27일, 김성재의 죽음을 다룬 책이 세상에 나왔다. 제목은 김성재의 첫 작품이자 끝 작품에 실린 곡 제목 '마지막 노래를 들어줘'였다. 현직 기자인 저자는 김성재의 팬(fan)으로서 펜(pen)의 의무까지 충실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그는 책을 위해 1년 동안 사건 관련 수사, 공판 기록과 신문 및 잡지 기사 등 3천 쪽이 넘는 관련 문서를 검토하고 당시 수사 관계자와 판사들, 유족과 지인들을 만났으며 법의학자와 의사들의 자문도 구했다. 그렇게 정리한 내용만 무려 500여 페이지가 넘는다. 허나 이미 '영구미제'라는 허무한 결론을 알고 있는 독자들 입장에서 이 책은 그저 고통스러운 옛 기억을 더 구체적이고 소름돋게 재생시키는 역할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였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1990년 11월 1일 김현식이 떠나고 1995년 11월 20일에 김성재가 떠났다. 불과 한 달 여 뒤엔 '내 눈물 모아'를 부른 서지원과 포크 스타 김광석이 5일 간격으로 똑같이 김성재를 따라갔다. 대체 1990년대 초중반 한국 가요계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2019년 11월 17일 오후, 성남 분당메모리얼파크에서 열린 김성재 24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한 오랜 팬은 함께 온 자신의 자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성재는) 우리 때 BTS나 마찬가지였단다."

두 달 뒤 성남에선 그의 26주기 추모식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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