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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호’ 김태리였기에 가능한 韓판 퓨리오사

2021.02.08

사진제공=넷플렉스


※ 영화 내용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예고편을 보며 불안했던 마음이 영화 시작과 함께 눈 녹듯 사라졌다. 영화 ‘승리호’(감독 조성희, 제작 영화사 비단길)의 이야기다. 정확히는 ‘승리호’의 김태리 이야기다. 공개된 예고편만 봤을 때는 김태리가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 우주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인지 의문이었다. 장르물의 정점인 우주 영화와 김태리가 가진 특유의 자연스러운 매력이 조화롭게 어우러질까 걱정이었다. 충무로 최초라는 외적 상황 외에도, 김태리 개인으로서도 여러 캐릭터의 앙상블이 중요한 작품 역시 ‘승리호’가 처음이었다. 연기 외의 장치가 치렁치렁 달린 상황 속에서 김태리가 연기 맛을 십분 보여줄 수 있을지 영 우려스러웠다.

 

하지만 김태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승리호’였다. 영화가 우주의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다시 이곳으로 정신없이 오가는 와중에 김태리는 우직하게 승리호의 선장 역할을 해냈다. 수많은 대사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가운데 김태리가 연기한 장 선장의 “안 돼. 정의롭지가 못해”라는 대사 하나만은 귀에 확실히 꽂혔다. 아닌 게 아니라, ‘승리호’에서 가장 또렷한 발음으로 중요한 대사들을 짚어낸 건 바로 김태리였다. 차분한 저음의 목소리는 우주 영화에서도 제 기능을 다 했다.

 

‘승리호’가 거둔 여러 성취의 중심에서 단연 김태리는 빛났다. 많은 이가 언급하고 있고, 필자 역시 감탄하며 지켜본 컴퓨터 그래픽의 완성도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할리우드 제작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자본으로 대부분 장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결과물을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성 정체성의 다양화, 전형성을 깨부순 시도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보아도 남성 캐릭터인 로봇 업동이(유해진)는 사람 피부 이식 수술을 받고 여성이 된다. 사실, 애초에 로봇에 성별이 있다는 생각부터가 편견이었던 거다. 아이 꽃님(박예린)이 업동을 “언니”라고 부르는 장면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사진출처=넷플렉스

그 가운데 소위 ‘예쁨’을 연기하지 않은 김태리의 캐릭터는 진정 반가웠다. ‘매드맥스’의 퓨리오사를 보며 느낀 쾌감이 ‘승리호’의 김태리에게서 느껴졌다. ‘승리호’에 시원시원한 질주의 감각을 더한 것에는 김태리의 역할이 컸다. 거기다 은근히 웃기기까지 하다. 김태리가 이런 식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가능하다니, 이 배우의 캐릭터 소화력은 어디까지일지 신선했다. 예고편만으로는 고개를 갸웃하게 했던 비주얼도 이제는 김태리가 아닌 다른 배우로는 상상하기 어렵다. 처음엔 낯설었던 올백 헤어스타일, 보잉 선글라스가 이제는 김태리의 트레이드 마크 가운데 하나가 될 것 같다. 가죽 재킷을 이렇게 멋스럽게 소화한 배우는 영화 ‘드라이브’의 라이언 고슬링 이후 김태리가 처음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이려나. 하여간 비주얼적으로도, 캐릭터적으로도 그동안 김태리에게서 볼 수 없었던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본 무대였고, 그것이 꼭 예쁘고 귀여운 모습이 아니라 더더욱 흥미로웠다.

 

돌이켜 보면 작품 안에서 늘 제 운명은 스스로 쟁취해내던 김태리였다. 영화 ‘아가씨’에서는 외조부의 책을 찢으며 아가씨(김민희)의 구원자를 자처했고, ‘1987’에서는 호헌철폐와 독재 타도를 울부짖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명문가 신분을 벗어던지고 의연하게 총구를 장전했다.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또 어떠한가. 차가운 편의점 도시락을 먹던 삶을 멈추고 느리더라도 제 속도로 사계절을 달리는 인생을 택한다. ‘승리호’에서도 대놓고 정의롭지는 않지만, 아니 오히려 속물에 가까웠지만 결국엔 정의를 향해 내달리는 믿음직스러운 선장이 바로 김태리였다.

 

신파 트라우마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한국 관객들에게 ‘승리호’는 2% 부족한 작품일 수 있다. 이 개성 넘치는 캐릭터, 세계관 속에서 꼭 부성애라는 코드를 택해야 했는지.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지 분명 아쉬운 지점이다. 엔딩에서 흥이 팍 죽은 것도 사실이었고. 그런데도 영화가 거둔 몇 가지 성과만큼은 확실히 박수 쳐주고 싶다. 그 중심에 김태리가 있다.

 

김수정(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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