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피면 죽는다'는 말을 무시하는 당신에게

조여정 고준의 호연이 호평 받는 코믹 미스터리 스릴러

2020.12.17

사진제공=KBS

국경일이 아닌데도 여자는 태극기를 내건다. 이유는 ‘결혼기념일’ 이라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 여자. 그에게 결혼은 그만큼 의례적인 일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일단 오늘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일단 멋대로 해석해 본다. 내걸린 태극기는 바람에 휘날린다. 깃발을 휘날리게 하는 것은 바람. 그렇다. 그 바람이 문제다.

 

KBS2 수목 드라마 ‘바람피면 죽는다’(극본 이성민, 연출 김형석)의  얘기다. 식상하게도 또 바람이다. 바람 피우는 이야기는 늘 형식을 달리하며 다양한 장르로 재생산된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기 때문이리라. ‘바람피면 죽는다’가 좀 다른 것은 (공식 홈페이지 소개에 따르면) ‘코믹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점이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조합은 제법 호기심을 자극했고, 몇 회 되지 않아 벌써 살인 사건까지 벌어진 것을 보니 앞으로 전개될 내용도 은근히 기대된다.

 

‘외도’, ‘불륜’이라는 고상한(?) 말이 있음에도 우리는 ‘바람’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이 좋은 단어에 누가, 왜 굳이 “몰래 다른 이성과 관계를 가짐”이란 의미를 추가했을까. 문학적 감수성을 최대한 끌어올려 나는 맨 처음, 이 행위에 이 단어를 매치한 이에게 감정이입을 해본다. 언젠가 과학 시간에 배웠듯 바람의 첫 번째 정의는 “기압의 변화 또는 사람이나 기계에 의해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이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공기의 움직임처럼, 마음이 움직임에 주목했던 것일까. 아니면 몸?

 

사랑 따위는 믿지 않을 것 같은 강여주(조여정)와 결혼하기 위해 한우성(고준)은 기꺼이 목숨을 건다. 바람 피면 죽는다는 각서에 서명할 때까지만 해도 한우성은 자신이 정말 죽음 근처에 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터. 죽을 각오 하고 피는 바람은 대체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사진제공=KBS

 

바람은 늘 배우자, 또는 애인이라는 주체가 있어야 가능한 행위다. 결코 완결에 이를 수 없는 미완의 쾌락. 그보다 바보 같고 소모적인 일이 없다고 믿는 나는 바람을 기꺼이, 능동적으로 ‘피우는’ 것이라 믿고 싶지 않다. 치밀하게 바람을 피우고, 그것을 정리하고, 다시 바람을 피우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한우성을 보면 바람은 그에게 있어 치명적인 고질병이라 정의하는 것이 맞을 듯싶다. “사랑한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했던 ‘부부의 세계’의 이태오(박해준)처럼 차라리 사랑이라고 변명이라도 해보던가.

 

그렇다. 사랑이라면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 사랑은 하는 것이지만 빠지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니. 마음이 속절없이 한 사람을 향해 무너져 내리는 것. 상대가 나를 보지 않아도 나의 마음은 오직 그 사람에게만 가 있는. 대개는 그런 마음일 때, 그리고 상대도 나와 같을 때 우리는 보통 결혼에 골인한다. 늘 꿈같은 행복의 나날일 것만 같지만 예식장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이미 ‘생활’은 시작되고, 내 품의 사람은 언제부턴가 항상 반짝거리지만은 않는다. 그럴 때 훅, 태풍처럼 혹은 미풍으로 다른 누군가가 눈에, 마음에 스며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바람이라면, 영화 ‘언페이스풀’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선 정말 바람과 함께 바람이 시작된다. 갑자기 불어닥친 돌풍에 여주인공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런 그를 한 남자가 도와준다. 우연을 운명으로 믿고 싶었던 것처럼 둘은 서로에게 빠져든다. 이 영화를 보며 마치 감기에 걸리듯 의도하지 않게 바람에 휩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바람을 다룬 모든 콘텐츠의 결말은 절대 해피 엔딩이 아니며 실제로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사진제공=KBS

 

불고, 맞고, 피우는 바람. 바람이 불고, 바람을 맞는 것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피우는 것은 전적으로 능동이다. 우리는 불을 피우고, 담배를 피우고, 연기를 피운다. 이 행위들은 한결같이 흔적 그리고 상처와 흉터를 남긴다. 가끔 꽃도 피우지만, 아름다운 순간은 그만큼 짧다. 최대한 양보해서 감기나 질병처럼 바람도 운이 나쁘면 걸릴 수 있는 병의 일종이라고 치자.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감염을 막거나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병이다. 바람은 결코 타협이나 굴복의 대상이 아니다.

 

모든 것이 평생, 눈부시게 빛날 수는 없다. 지금, 배우자와 함께 살고 있다면 둘만이 공유한 찬란한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찬란한 빛이 은은하게 바뀌고, 설사 조금 바랬더라도, 함께 사는 사이라면 결코 상대를 배신해선 안 된다. 깃발은 바람에 흔들려도 결국 깃대에 묶여 있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전혀 다르게 살던 남녀가 만나 한평생을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코믹 미스터리 스릴러’다. 이 인생 드라마를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는 결국 두 사람에게 달린 것이다.


이현주(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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