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토반',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한 한국 여성영화

2020.10.26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지난 21일 개봉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이 아주 조용히 박스오피스 1위를 이어가고 있다. 조용히 우리 곁에 찾아온 이 영화는 유명한 스타감독도 톱스타 배우도 없는 정직하고 검소한 작품이다. 배꼽잡는 커다란 웃음 대신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저절로 걸쳐지게 만들고, 펑펑 흘리는 감정폭발 눈물 대신 옆 사람 몰래 눈가로 한줄기 작게 흘리는 눈물을 쓱 훔치게 만드는 영화다. 커다란 재미보단 그 속에 잔잔하고 차분하면서도 진주처럼 강하게 박힌 의미가 깊은 영화. 그래서 아주 커다란 카타르시스와 재미를 기대하고 간 관객은 실망하는 눈치였고, 나처럼 새로운 영화를 보고팠던 관객은 대만족을 했다.

 

누구나 알아주는 명품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고, 알아주지 않는 브랜드나 보세라도 다른 사람이 걸친 것과 다른, 자기만의 스타일과 핏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요즘의 한국영화는 후자다. 브라보!!! 마침 대감독들의 비싼 명품작품들에 질렸던 차. 비싼 명작들이 왜 질리냐고? 예쁜 여자, 잘생긴 남자가 덜 생긴 사람들보다 더 잘 질리는 법. 인간은 원래 의리가 없고 변덕스럽고, 관객은 더 잘 변심한다.

 

요즘 한국영화는 유명한 스타감독과 대스타 배우들보단 신인감독의 실험적이면서도 참신한 기획을 담은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늘 익숙한 명품의 맛에 길들여진 관객들은 (그러니까 내가 정확한 평가와 느낌을 알 수 있는 관객이래봤자 내 지인들 뿐이지만) 고개를 갸웃하지만, 이것은 한국영화계가 아주 올바른 방향으로 잘 가고 있다는 아주 좋은 청신호.라고 감히 장담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늘 익숙한 걸 선호하지만, 결국 인류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건,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실험과 시도일 것이다. 이것이 있어야 무엇이든 발전하고 진화한다. 왜 신인감독들의 참신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지도 안다. 대자본을 투입하고 대스타 배우들이 출연하는 스타감독들의 비싼 영화를 지금 코로나 정국에 개봉했다간 자칫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일 것. 무튼 요즘 속속 개봉하는 신선한 작품들을 보고 있자니,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실감난다. 코로나 때문에 영화계가 완전히 망했다.라고 생각했는데, 망할 줄 알았던 영화계가 새로운 변화와 바람으로 진화하고 있었다는 반가운 기분을 느끼게 해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고아성(이자영역), 이솜(정유나역), 박혜수(심보람역) 세 여자 배우가 주인공. 95년도를 배경으로 전자제품을 만드는 삼진그룹에 고졸 출신으로 입사한 세 여자는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커피 잘 타기, 구두닦이, 사무실 청소등이 주 업무다. 자영은 세탁기와 분리된 건조기를 개발하고 싶어하고, 유나는 마케팅업무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졌지만, 누구도 고졸 출신인 그녀들의 재능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수학 올림피아드 출신의 수학천재 보람은 그 뛰어난 수학재능을 남직원들의 룸살롱 영수증을 가짜 영수증으로 메우는 데 허비한다. 심지어 진급길조차 막혀있다. 그러던 중 고졸 여사원들에게 영어토익 600점을 넘으면 진급을 시켜준다는 회사 공고가 붙고, 그녀들은 회사 토익반에 들어가 영어공부를 시작한다.

 

자영은 지방 공장에 출장을 갔다가, 그 곳 하수구에서 페놀이 방출되어 물고기들이 다 죽어있는 걸 보게 된다. 자영보다 늦게 들어왔지만 대리로 진급한 남자직원은 그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고개를 돌려버리지만, 자영은 페놀을 방출한 회사와의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다. 거대 회사의 비리를 고졸출신 여사원 세 명이 싸워 승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실제로 1991년도 있었던 구미 낙동강 폐수 유출 사건을 그린 실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써니'(2011. 감독 강형철)나 '82년생 김지영'(2019년. 감독 김도영)을 떠올리게 하는데, '써니'보단 덜 코믹하고 담담하고, '82년생 김지영'보단 유머러스하고 가볍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같은 복고감성을 기대했다면 그건 좀 실망할 것이다. 복고적인 배경과 의상, 소품들이 등장하지만, 영화를 움직이는 큰 플롯이 거대회사와 싸우는 약자들의 싸움이다 보니, 복고적 소품들만 등장할 뿐, 복고감성을 집어넣을 여지는 없다.

 

한 가지 반가운 사실은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대부분의 여자는 공감하고 좋아했던 반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공감하지 못했는데, 이 영화는 포털에서 관객평과 좋아하는 남녀비율을 찾아보니 거의 성비가 비슷하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아마도, '82년생 김지영'이 아주 직설적으로 남녀차별을 얘기하고 약자로서의 여성을 다큐처럼 사실적으로 그렸다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좀 더 부드럽고 유하게 돌려 말했기 때문이리라. 여자로써 차별 받는 것보다, 사회적 약자로써 차별 받는 게 더 커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해도 직설적으로 따끔하게 얘기하는 것과, 부드럽게 돌려 말하는 게 이리 큰 차이가 있다.


난 늘 직설적으로 코 앞에 대놓고 따지 듯 얘기를 해서 남자를 질리게 한다는 평을 많이 들어왔는데, '82년생 김지영'과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다. 물론 고쳐지진 않겠지만.

 

이 영화의 명대사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는데~?”는 이 영화에게 딱 맞는 대사다. 어제의 페미니즘 영화보다 오늘 더 성장한 페미니즘 영화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영화인 것 같다.


고윤희(시나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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