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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기록’ 성격 좋은 변우석님아, 흑화되지 마오!

2020.10.19

사진제공=tvN


어디에 사는가. 이것이 단순한 ‘지정학적 위치’의 개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계급’을 동반한다는 걸 대학에 와서야 알았다. 지방에서 갓 상경해 서울 물정에 무지했던 나는, 거주 지역이나 아파트 브랜드명만으로도 사람의 인생을 빠르게 추리해내는 친구들의 능력에 감탄했다. 순진한 시절이었다. 마침 학기 초, 연극과의 한 신입생을 둘러싼 소문이 무성하게 가지를 쳤다. 요는 그 친구 아버지가 이름이 꽤 알려진 회사의 사장님이라는 사실이었다. 집이 한남동 부촌 어딘가라고 했던가. 그런데 그게 뭐. 그 친구는 날이면 날마다 명품 옷을 입고 나타나 수업을 대충 듣고 스포츠카를 타고 떠났다, 면 재수 없었겠지만 그런 드라마적인 클리셰는 한 번도 펼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금수저를 향한 시선엔 어떤 ‘편견’이 자주 개입됐다. 가령 그 친구 특유의 낙천적인 면모를 두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잘 사니까 낙천적인 거야.” 먼 훗날 나는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의 아내 충숙(장혜진)이 내뱉는 대사에 포복절도할 수밖에 없었다. “부자니까 착한 거야.”

 

‘청춘기록’에서 변우석이 연기한 원해효를 보면서 그 친구 생각이 났다. 배우를 꿈꾸는 원해효는 대학 이사장인 아버지와 미대 교수 출신 어머니를 둔 ‘본 투 비 금수저’다. 보통 드라마에서 ‘서브 남주’가 부자인 경우 나타나는 몇 가지 패턴이 있다. 사랑을 얻기 위해 돈이라도 지불하겠다고 토로하거나(“사랑? 웃기지 마. 얼마면 돼!” ‘가을동화’ 원빈), 자유로운 영혼임을 내세우거나(“내 안에 너 있다” ‘파리의 연인’ 이동건), 물불 가리지 않고 직진하거나(“눈 그렇게 뜨지 마. 떨려” ‘상속자들’ 김우빈) 하는 것들 말이다. 해효는 기존 드라마의 서브 남주 금수저들과는 결이 좀 다르다. 그는 천하천하유아독존 마인드의 소유자가 아니다. 지나치게 젠틀해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남자도, 줏대 없는 마마보이도 아니다. 주어진 배경에 기대지 않고 보란 듯이 성공해 금수저의 편견을 깨고 싶은 인물, 그것이 원해효다. 잘난 척하지 않고 주변 사람을 챙기는 따뜻한 성품까지 갖췄으니, 꽤 괜찮은 청년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는 이유. 해효에게서 오래전 ‘발리에서 생긴 일’의 정재민(조인성)에게 봤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극성 부모를 둔 정재민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그로 인해 역으로 억압받는 인물이었다. 해효는 자신이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 삶의 상당 부분이 부모에 의해 만들어진 신기루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달려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가 이뤄 놓은 많은 것들이 실은 어머니 이영(신애라) 여사의 치맛바람에서 완성됐다. (이 극성인 엄마가 1994년 ‘사랑이 그대 품안’에서 말표 빨랫비누로 머리를 감았던 흙수저 여인 신애라라니.) 이영은 아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 팔로워 수를 돈으로 사고, 드라마 관계자들에게 은밀하게 뇌물을 건네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날 해효는 무너질 것이다. 왜냐하면 해효에게 ‘허영심 가득한 금수저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건 일종의 자부심이고 자존감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tvN

 

‘청춘기록’은 색깔이 다른 수저를 물고 태어난 절친 사혜준(박보검)과 원해효 두 인물의 그래프가 교차하며 역전되는 플롯으로 진행 중이다. 밑바닥에서 출발한 흙수저 혜준의 그래프가 우상향을 타고 있다면, 해효의 그래프는 우하향 중이다. 계급 차이가 나는 이들의 우정을 오래도록 가능하게 한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혜준의 자존감이었다. 우정은 동등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어서 한쪽이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이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혜준에겐 해효와의 관계에서 열등감을 느낄만한 부분이 꽤 있었다. 집안 차이도 그렇거니와, 엄마(하희라)가 해효네 집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걸 개의치 않아 하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다. 게다가 해효의 인지도에 밀려 오디션에서도 탈락. 그러나 혜준은 현실을 탓하거나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멋지다”고 되새기며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돌파구를 찾아 나갔다.


해효는 다르다. 여러 고난과 불행을 통과하며 면역력이 생긴 혜준과 달리, 해효는 무방비 상태다. 한때 동반 화보를 챙겨줬던 친구는 이제 대한민국의 톱스타가 됐다. 무엇이든 혜준보다 한발 앞섰던 해효는 이제 혜준의 뒤에서 그를 본다. 친구의 성공이 기쁘면서도 부럽다. 처음 겪는 감정이다. 엄마는 그런 해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자존심도 없느냐”고 몰아세운다. 역시 처음 겪는 상황이다. 돌이켜보면 해효가 혜준의 여자 친구 안정하(박소담)에 더 빠졌던 건, 정하가 혜준과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먼저 다다르지 못한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해효에게 이 모든 변화가 버거운 건 어쩌면 당연하다. 부모의 보호 아래 부족함 없이 지내 온 그에게 면역이 자랄 만한 시간은 주어진 적이 없으니.

 

이제 이 우정의 공은 해효에게 넘어왔다. 앞서 말했듯, 피해 의식이 정신 건강을 갉아먹으면 우정은 유지될 수 없다. 다행인 것은 해효가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과거 혜준이 느꼈을지 모를 감정들을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 반대로 불안한 것은 해효에겐 아직 정산해야 할 진실(SNS 팔로우 수 등) 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마침 “해효의 본 투 비 여유가 거슬린다”는 톱스타 박도하(김건우)가 이 사안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진실은 조만간 폭로될 것이고 해효는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해효도 성장하리라 믿는다. 고난을 엮은 후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굴국 없는 삶을 살아 온 사람보다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이해도가 더 넓어지니 말이다. 그러니 님아, 부디 흑화되지 말고 위기를 잘 견뎌내길.


정시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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