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리 휴대전화를 훔쳐보다 얻은 위로!

2020.09.11

사진출처='페이스 아이디' 방송 캡처


고백하자면, 난 핑클 시절 이효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이효리파, 성유리파로 나뉠 때도 난 시큰둥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중도의 길을 택했다. (사실 S.E.S의 팬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효리에겐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가 어쩐지 핑클의 노래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팬으로 삼기엔 넘을 수 없는 벽이 느껴졌다. 명절에만 가끔 만나는 무서운 사촌 언니 같은 느낌이었달까. 여하튼 이효리는 내게 관심 밖 연예인이었다.

 

이효리에게 눈길이 가기 시작한 건 그가 ‘텐미닛’으로 대한민국을 그야말로 ‘싹쓸이’했던 솔로 데뷔 이후였다. 10분 안에 남자를 꾀어버리겠다는 화끈한 가사도 가사였지만,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세련된 스타일과 섹시한 퍼포먼스는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 8090 세대에겐 없었던 여성 아이콘이 탄생하는 순간을 생생하게 목도하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이효리가 입는 걸 따라 입고, 바르는 걸 따라 바르고, 먹는 걸 따라 먹기 시작한 게.

 

최근 카카오TV에서 ‘페이스 아이디’라는 이름의 영상을 공개했다. 이효리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는 콘셉트의 15분 분량의 콘텐츠다. 나는 보는 내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어떻게 이효리 휴대전화를 들여다볼 생각을 했지?!’

 

어느 정도 설정이 가미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효리는 제작진에게 휴대전화 구석구석을 낱낱이 공개했다. 반려견 용품을 사고판다는 중고거래 애플리케이션(이하 앱), 배란일 앱, 다리 길이를 늘여주는 보정 앱 등.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앱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뿐만 아니다. 강아지 사진만 1000여 장인 사진첩을 보며 “정말 개천지, 개판이네요”라고 하는 이효리의 능청스러움이나, 화장실에서 떠오르는 악상을 변기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녹음한 음성 메모, 오전 4시에 맞춰진 알람시계 등 이 모든 게 새로웠다.

 

이효리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TV와 SNS를 통해 이미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대체 어느 연예인이 배란일 앱과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까지 대중에게 공개하겠나. 내 연인이나 가족의 휴대전화만 훔쳐봐도 재밌을 판인데 이효리의 전화기 속이라니. 재미없을 수가 없잖아!

 

그래서 이효리는 남편 이상순의 휴대전화를 살펴본다. “오빠는 이제 나한테 딱 걸렸어. 이제 망했다고 보면 돼. 야동 본 거 다 나와”라며 이상순의 휴대전화를 이 잡듯 뒤져보는 이효리의 모습은 마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방바닥을 데굴데굴 뒹굴며 웃었다. “인스타그램을 왜 2시간 33분이나 했어”, “소유 왜 검색했어”, “트와이스 나연 수박 퍼포먼스 영상이 왜 뜨는 거야”라며 이상순을 취조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세상 모든 연인과 부부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명장면이었다. 당황한 이상순의 표정 역시 킬링포인트. 그가 유튜브에 ‘이상순 사주’를 검색했다는 사실도 미치도록 웃겼다.

 

‘페이스 아이디’ 속 이효리는 남편의 동영상 검색 내역을 신경 쓰고, 수백 장의 사진 가운데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고심 끝에 골라 SNS에 올리고, “오늘만큼은 몸과 마음을 활짝 열어드리겠다”라고 남편의 스킨십과 임신에 대해 언급한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도 또 부캐 린다G로 제2, 아니 제3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톱스타도 결국 사는 건 비슷하단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사진출처='이효리의 오프더레코드' 방송 캡처


이효리의 관찰 예능은 ‘페이스 아이디’가 처음이 아니다. 2008년 방송된 Mnet ‘오프 더 레코드, 효리’는 관찰 예능의 효시였다. 무려 3개월간 이효리의 일상을 CCTV 수준으로 따라붙어 촬영한 ‘오프 더 레코드, 효리’는 다시 생각해도 신선한 기획이었다. 방송에서 이효리가 몰던 박스카는 그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자연 가슴을 인증한 에피소드는 지금까지도 온라인상에서 화제다. 2017년과 2018년 방송된 JTBC ‘효리네 민박’은 관찰 예능은 아니었지만, 이효리의 집이 공개되며 제주도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페이스 아이디’를 보며 이효리와 생의 주기를 함께 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오프 더 레코드, 효리’에서 방 한가득 넘쳐나는 옷과 가방에 주체 못 하던 서른 살 이효리의 모습은 딱 몇 년 전 나의 모습이었고, 조용한 곳에서 홀로 차와 운동으로 힐링하는 40대 이효리의 일상은 지금의 내 모습과 겹쳐 보인다.

 

이효리는 요가 사진을 SNS에 올리며 “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만의 중심 잡기”라는 글을 썼다. 그러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다 뻥이에요. 저도 다 넘어지고 흔들리고 뒹굴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이 그렇게나 위로가 됐다.

 

나이테가 한 줄씩 늘어날수록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가 달라진다. 이제는 북적거리는 모임과 도시보다 소박한 가족과 자연이 좋고, 비싼 옷보다 건강에 관심을 쏟고 싶다. 밤새 잠 못 이루게 하는 사람보다, 따뜻한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 좋다. 가치가 달라지니,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화려한 치장과 인맥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더욱더 단단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건강한 태도, 단단한 습관, 다정한 가족들. 명품백보다 소중한 이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선 나만의 중심을 지켜야 하는데, 이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이효리의 한마디에 뭉클한 위로를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효리가 SNS를 탈퇴했다는 이유로 며칠째 온라인이 뜨겁다. 다음 ‘페이스 아이디’ 에피소드에서는 그 비하인드가 공개될 예정이다. 이효리처럼 악플을 받지도, 팔로워가 많지도 않지만 SNS 속 세상에 피로감이 높아진 요즘이었기에,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SNS쯤 안 하면 어때. 이효리는 이효리만의 방식대로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 훌훌 털어버릴 텐데. “흔들리는 세상에서도 나만의 중심 잡기”를 부단히 노력하는 이효리이기에 그럴 것이라고, 나 역시 그러고 싶다고 바라본다.

 

김수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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