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억압의 문을 부순 노라들, '와이프'

2020.08.11



1879년 입센이 발표한 연극 '인형의 집'은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작품이 발표될 당시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는 노라의 행동 때문에 신성한 가족을 파괴한다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독일 공연에서는 노라 역을 맡은 배우가 자신은 아이들을 두고 집을 떠나는 연기를 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티는 바람에 결말이 수정되기도 했다.


연극 '와이프'는 시대의 혁명과도 같았던 연극 '인형의 집'을 중요 소재로 삼는다. 지난해 동아연극상 작품상, 연출상을 비롯해 각종 연극상을 휩쓴 작품으로 세종S시어터 공연을 마치고 대학로예술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공연한다.

 

연극 '와이프'는 1959년, 1988년, 2020년 그리고 2042년 대략 2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네 개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각 에피소드는 노라가 신성하다고 믿었던 가족의 문을 박차고 나가는 연극 '인형의 집'의 마지막 장면으로 시작한다. 연극에 출연한 배우, 이를 보러온 관객, 또는 제작자가 등장인물이다. 입센은 기존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아내는 그저 예쁜 인형 정도로만 취급하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1879년 희곡 '인형의 집'이 발표되었을 때, 그 내용만으로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노라가 집을 박차고 나선 것은 기존 가족 이데올로기의 저항이자 혁명과도 같은 행위였다.

'와이프'에는 여성 대신 이성애의 벽에 억눌려 있는 동성애자가 등장한다. 1959년 노라를 연기한 수잔나와 연인 데이지, 1988년 데이지의 아들 아이바와 그의 연인 에릭, 2020년 에릭의 딸 클레어와 아버지의 옛 연인 아이바. 각 시대의 인물들은 연결되어 있다. 1959년의 커플은 동성애임을 알리지도 못하지만 1988년 아이바 커플은 적어도 펍의 작은 테이블에서만큼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2020년에는 연출가가 된 아이바와 그의 동성 연인은 법적으로는 부부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2042년에는 동성 결혼이 일상으로 들어온다.



이처럼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낮아지고 세상은 진화했다. 연극 '와이프'는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발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반복되는 제약과 편견을 드러낸다. 2020년 아이바 커플은 공연계에서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중년이 된 에릭은 성 소수자에 권리를 외치다 사망한다. 자유의 발전을 이야기하면서도 변화 자체보다 그것을 가져오게 했던 행동에 방점을 둔다. 노라가 문을 박차고 나갔듯, 1988년의 아이바는 펍에서 편견으로 가득 찬 부당한 요구에 반발했고, 2020년대 중년이 된 에릭은 성 소수자의 권리를 외치다 죽임을 당한다. 성 소수자의 권리가 높아졌다면 그것은 침묵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세상의 변화를 위해 발언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결국 문을 박차고 나가지 못했던 1959년의 데이지, 1988년의 에릭의 자식을 다음 세대에 등장시킨다.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똑같은 문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경고인 셈이다.


행동을 통한 사회의 변화. 이것은 동성애자의 권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와이프'는 이것을 연극의 존재 이유로 발전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와이프'는 연극에 대해 말하는 메타 연극이다. 재현되는 '인형의 집' 마지막 장면은 시대마다 스타일을 달리한다. 1959년에는 정통을 기반으로 한 캐주얼한 스타일로, 1988년은 아방가르드한 연극으로, 2020년은 성을 바꾼 젠더 프리 스타일로 공연된다. 각 시대마다 시대의 주류 연극 스타일로 '인형의 집' 마지막 장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2042년 미래연극은? '와이프'는 많은 예상을 깨고 2042년 '인형의 집' 공연을 1879년 입센이 만들었음직한 가장 정통적인 연극으로 보여준다. 2042년에 노라 역을 맡은 수잔나는 이 공연을 끝으로 은퇴하려고 한다. 소용이 다한 연극, 그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하지만 유망한 의학도 데이지는 그의 연극을 보고 안정된 삶 대신 의미 있는 삶을 선택한다. 수백 년이 지나도 세상의 벽을 박차고 나선 로라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주고 그것이 연극의 살아있는 가치임을 일깨운다. '와이프'는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또 다른 편견과 약자에 대한 억압은 존재하고, 그것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연극의 소임임을, 그리고 그것이 살아있는 연극이라고 말한다.


박병성(공연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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