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이 ‘나’를 말할 때

2020.08.06

여자친구 사진제공=쏘스뮤직


아이돌이 ‘나’를 말한다는 건 얼핏 비문처럼 보인다. 극도로 상업화된 음악이 팔리는 곳, 무엇이든 비즈니스로 접근하려는 시도만 가득한 이곳에서 온전한 나를 꺼내 대중 앞에 늘어놓는다는 건 꽤 무모하고 일견 위험하게까지 보인다. 평소에는 대중이 원하는 혹은 주어진 책임에 충실한 역할을 해내는 아이돌도 그러나 가끔은 오랫동안 숨겨왔던 진짜 나를 노래한다. 쉽게 들을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고도화된 산업의 파편들. 누군가에는 그래서 불편하고 누군가에는 그래서 편안할 이야기들이다.

 

 

여자친구 – 북쪽계단 ([回:Song of the Sirens] (2020))


아름다운 북유럽 우화의 엔딩 장면에 흐를 것 같은 이 노래는 사실 데뷔 6년 차를 맞이한 걸 그룹 여자친구의 지금을 가감없이 담은 일기장 같은 곡이다. ‘북쪽계단’은 데뷔곡 ‘유리구슬’에서 현재 진행 중인 ‘회(回)’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를 뒤로하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내일 앞에 선 여자친구의 외롭고 두려운 시간을 토로한다. ‘앞만 보며 쉼 없이 걷다 보니 이 계단 끝에’, ‘이미 익숙해진 갈채와 따뜻한 기억들’, ‘인사를 남기고 내려갈 시간이야’ 같은 꽤 직설적인 고백들은 마치 교차로 앞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처럼 들린다. 새로운 햇살 아래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용기를 채우며 끝을 맺는 이야기는 방시혁과 FRANTS가 다듬었다. 멤버들과 그 언제보다 많은 대화를 나눈 뒤작업한 곡이라고.


태민 – 2 KIDS (2020)


데뷔 13년 차, 인생의 절반을 아이돌로 보낸 사람이 노래하는 청춘과 사랑은 어떤 그림일까. 태민의 ‘2 KIDS’는 그 질문에 그가 걸어온 시간만큼이나 모범적인 답을 제시한다. 미니멀한 구성의 일렉트로 팝 사운드를 들려주는 노래는 누구에게나 남아있는 아픈만큼 아련한 어린 사랑의 기억을 꾸밈없는 소리와 언어로 담아낸다. 작사가 조윤경과 태민이 공동으로 작업한 노랫말은 시간이 지나고 보니 참 예뻤던, ‘어리고 멍청한 서툴렀던 맘’으로 얼룩진 시간을 차분하고 덤덤한 어조로 그려낸다. 온통 실수뿐이었던 풋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그 ‘두 사람’은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꾼다. 사랑했던 연인과 나, 오랜 시간 동고동락을 함께한 멤버와 나, 나의 소중한 애물단지인 나와 또다른 나. 심플한 만큼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의 진폭도 넓은 곡이다.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



핫펠트 – Life Sucks ([1719] (2020))


‘Life Sucks’는 핫펠트의 첫 정규 앨범 '1719'의 첫 곡이자 자신도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괜찮을까’ 걱정했다는 곡이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의 주요 테마는 타인에게 털어놓기 쉽지 않은 개인적인 가정사이고, 심지어 대부분이 가십으로 세상에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핫펠트가 택한 건 정면승부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해당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는 스물아홉이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작스레 보낸 편지로 시작해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일종의 한풀이자 살풀이처럼 느껴지는 노래는 그러나 그만큼의 카타르시스를 담보한다. 하고 싶은 말을 속시원히 하고 난 뒤 밀려오는 후련함, 당신이 아는 바로 그 기분이다.

 

선미 – Black Pearl ([WARNING] (2018))


선미의 ‘Black Pearl’은 어찌 되었든 ‘나’를 대중 앞에 선보이고 그것으로 사랑받아 삶을 영위해야 하는 존재를 검은 진주에 빗댄다. 갖은 상처와 아픔으로 상할 대로 나의 속은 ‘추한 까만 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렇게 얼룩진 속을 모르는 이들은 그저 내가 예쁘고 곱다며 찬사를 보낸다. 환멸나는 세상에 대한 체념과 해탈은 결국 ‘날 가만히 놔뒀으면 좋겠어’라는 외침으로 폭발하지만 요동치던 메아리는 멜로우한 비트 사이로 다시 힘없이 스며든다. 다행인 건 그 소멸이 포기나 좌절이 아닌 남들이 뭐라건 그저 내 갈 길을 가겠다는 우직한 발걸음을 밑바탕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돌, 특히 여성 아이돌로 10년을 버틴 사람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속 깊은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그 자체다.

 

방용국 – 히키코모리 ([BANGYONGGUK] (2019))


아이돌 그룹 B.A.P의 리더로 활동하는 내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던 방용국은 그러나 항상 말한다. 분명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그 모두가 의미 있었다고. 그렇게 모든 걸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성정의 그가 그룹과 회사를 떠나 완벽히 혼자만의 힘으로 완성해 낸 'BANGYONGGUK'은 그래서 그의 내면에 자리잡은 어둠이 더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앨범이었다. 그 어떤 장벽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장소를 비로소 찾은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허겁지겁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똑같기를 강요받고 싶지 않은 나, 나만의 세계에서 방해받기 싫은 나, 가면을 벗고 춤을 추는 나와 나와 또 나. 이렇게 많은 내 안의 나를 그동안 어떻게 감추고 살았나 싶다.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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