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몰아보기

드라마 못지않게 매운 스크린 속 '부부의 세계'

2020.04.21

영화 '언페이스풀' 스틸.

시청자 관심을 빨아들이는 JTBC 금토 드라마 ‘부부의 세계’ (극본 주현, 연출 모완일) 기세가 매섭다. 욕하면서 보게 된다는데, 고구마 백 개 먹으면서도 보게 된다는데, 먹어도 먹어도 손이 가는 새우깡 같은 드라마라는데, 뒤늦게 입문했다가 6회까지 정주행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람은 판단력 결여로 인해 결혼하고, 인내력 결여로 이혼하며, 기억력 결여로 재혼한다’라고 말한 프랑스의 극작가 아르망 사라클의 발언을 살벌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는 드라마를 보며, 문득 스크린 속 ‘부부의 세계’를 떠올려봤다.

 

[부부의 세계 1] ‘언페이스풀’, 모든 게 완벽했었다

 

결혼기간: 11년

아내: 코니 섬너(다이앤 레인), 남편: 에드워드 섬너(리처드 기어)

상간남: 폴 마텔(올리비에 마르티네즈)

불화요인: 아내의 외도

상징대사: “난 모든 걸 바쳤지만, 당신은 모든 걸 한순간에 버렸어”-에드워드

자매영화: ‘해피엔드’

 

사건개요: 가정적인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들, 뉴욕 근교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 자리한 넉넉한 살림의 집까지. 40대 주부 코니 섬너를 둘러싼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 남자 폴 마텔이 나타나기 전까진. 맨해튼으로 쇼핑을 나간 코니는 강풍을 피하려다 넘어져 상처를 입고, 길을 지나가던 폴이라는 젊은 프랑스 남자의 도움을 받게 된다. 코니의 다리에 난 상처를 보고는 근처 자기 집으로 가서 치료하자는 이 남자는 무엇? 그런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코니는 또 무엇? (님아, 그곳에 가지 마오!) 그러나 전기에 이끌리듯 코니는 폴을 따라가고, 그의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그녀를 둘러싼 완벽했던 삶은 파국이어라. 코니의 불륜을 눈치챈 에드워드는 아내의 뒤를 캐고, 결국 손에 피를 묻히고 만다.

 

파국의 시작: 무릎 상처. 사실, 별거 아닌 상처였다. 그러나 그 상처는, 코니의 ‘숨은 욕망’을 들추고 만다. 무릎에 난 상처는 반창고로 가려져도, 코니의 마음에 들어찬 욕망은 숨겨지지 않는다. ‘나인 하프 위크’ ‘위험한 정사’ ‘은밀한 유혹’에서 끈적이는 관능의 영상미를 보여줬던 애드리안 라인의 작품답게 카메라는 욕망으로 뒤엉킨 두 남녀의 육체를 탐하는데 거침이 없다. 19금 ‘으른 영화’인 이유.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다이앤 레인의 미세한 표정이다. 폴과 첫 번째 정사를 나눈 뒤, 집으로 기는 기차 안에서 코니는 남자와의 뜨거웠던 섹스를 회상하며 사시나무 떨듯 전율한다. 끓어오르는 욕망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웃다가, 그런 자신을 책망하며 죄의식에 괴로워하는 코니. 화장실로 달려가 몸에 남은 남자의 흔적을 화장지로 정신없이 닦아내지만 이미 그녀의 세계는 달려진 후다. 뻔한 치정극에 머무를 뻔한 이 영화가 지금가지도 회자되는 것은 여자의 심리를 너무나 잘 파악해 낸 연출과, 다이앤 레인의 연기 덕분이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 스틸.


[부부의 세계 2] ‘아내가 결혼했다’, 일처다부제 뒤집기

 

결혼기간: 신혼

아내: 주인아(손예진), 남편: 노덕훈(김주혁)

아내가 결혼한 남자: 한재경(주상욱)

불화요인: 이중결혼

상징대사: “내가 별을 따달래, 달을 따달래, 그냥 남편 하나 더 갖겠다는 것 뿐인데..”

자매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사건개요: 아내가 결혼했다. 이혼한 아내도 아니고, 법적으론 남남인 아내도 아니고, ‘내’ 아내가 결혼했다. 나도 사랑하고, 그놈도 사랑한다나. 아내랑 결혼한 녀석은, 넉살도 좋지, 날 보고 “형님이라네?” 그 와중에 아내가 아이를 낳았으니, 저 아이가 내 아이인지 그놈 아이인지 그것도 문제로세. '사랑과 전쟁-부부클리닉'에나 나올법한 기상천외한 사연이라 생각한다면, 가부장 중심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자 하나를 두고 다투던 본처와 첩이 어느새 형님동생하며 사이좋게 살아간다는 설정은 많이 봐 오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성별만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개봉 당시에도 ‘일부다처제’를 전복시킨 ‘일처다부제’ 소재가 뜨거운 화제가 되긴 했지만.

 

파국의 시작: 축구. 클럽 FC바르셀로나의 열혈 팬인 인아와, 레알마드리드 덕후인 덕훈. 말하자면 모든 것은 축구 ‘덕분’이다. 축구가 없었다면 인아가 덕훈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을 테니. 축구를 너무 사랑하는 이 여자는 사랑에도 축구 전술을 대입한다. 나와 그놈 중 한 명을 선택하라는 덕훈에게 인아가 베컴과 피구를 빗대며 하는 말 “우리 팀은 투톱 체제야!” 기가 차는 건 덕훈이나 관객이나 피차일반이다.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시키는 힘의 8할은 주인아라는 대찬 캐릭터와 그런 인아를 연기한 손예진의 매력이다. 빙하도 녹여버릴 것 같은 살살 녹는 애교부터 헌책을 사랑하는 지적인 면모와 웬만한 남자 뺨치는 축구 전문 지식, 우비 하나 달랑 걸친 채 거리를 활보하는 도발적인 매력까지. 인아는 남자들의 로망을 압축해 놓은 여자다. 그런 인아를 반달 눈의 눈웃음을 장착한 손예진이 귀엽고도 사랑스럽게 그려내니, 손예진이 곧 개연성이었던 영화였달까.


영화 '미스터 &미세스 스미스' 스틸.


[부부의 세계3]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이거, 사기결혼인가요?

 

결혼기간: 6년차

아내: 제인 스미스(안젤리나 졸리), 남편: 존 스미스(브래드 피트)

불화요인: 사기 결혼, 대화 부족, 권태기

상징대사: 자기, 아직 살아있어?(You still alive baby?♥)

자매영화: ‘장미의 전쟁’ ‘마누라 죽이기’ ‘싸움’

 

사건개요: 부부 사이라고 해서 100% 솔직할 수는 없다. 때론 적당한 거짓말이 부부 생활의 동아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스미스 부부는 거짓말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아니, 자신들의 신분조차 숨기고 결혼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사기 결혼’이야. 게다가, 하필이면, 두 사람은 라이벌 조직 소속의 특급 킬러. 그런 사실을 모르고 첫눈에 반해 결혼에 골인한 이들은 서로를 속이며 6년째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으니, 제인은 남편이 아끼는 공구 창고가 폭탄과 총들이 장전된 무기고라는 걸 알 턱이 없고, 존은 주방 오븐이 아내의 무기고라는 걸 눈치챌 여력이 없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기만적인 결혼생활이었던 것. 그러던 어느 날 부부는 외나무다리에서 맞닥뜨리고, 상대방을 제거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하루아침에 적이 된 스미스 부부. 서로의 비밀이 하나둘 까발려질 때마다 당혹스러움과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며 서로에게 총구를 들이민다.

 

파국의 시작: 권태기. 서로를 속이고 결혼한 것도 문제지만, 스미스 부부의 진짜 위기는 권태기. 처음 만났을 때의 열정은 사라지고, 섹스리스 수준에 이른 부부는 부부클리닉을 찾아 상담도 받지만, 백약이 무효하다. 물론 권태기는 스미스 부부에게만 닥치는 일이 아니다. 권태기 앞에 무릎 꿇고 이혼 서류에 도장 찍은 커플이 어디 한둘인가. 뇌과학자들은 그 원인을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에서 찾는다는데, 어쨌든 스미스 부부도 ‘사랑의 유효기간’ 종료를 앞두고 피 터지게 싸우게 된 셈이다. 그런데 부부클리닉에서도 해결 안 되던 마음의 앙금이, 터놓고 싸우다 보니 오히려 시원해지는 기분은 뭐람. 영화는 ‘아무리 가까운 부부라도 상대를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거대한 교훈을 안기며,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라는 유행가 가사를 호출한다. 영화 외적으로 브래드 피트-제니퍼 애니스톤의 결혼생활 종말을 맞게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당시 큰 화제가 됐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세기의 커플이 된 브래드 피트-안젤리나 졸리도 이제는 남남이 됐으니, 부부의 세계란.


영화 '올가미' 스틸.


[부부의 세계4] ‘올가미’, 시어머니의 도(道)를 묻습니다

 

결혼기간: 신혼

아내: 수진(최지우), 남편: 동우(박용우), 시어머니: 진숙(윤소정)

불화요인: 고부갈등

상징대사: “넌 내 아들을 위해 사준 장난감에 불과해!”

자매영화: ‘시월드’는 임성한 작가 전매특허!

 

사건개요: 50대 여성 진숙(윤소정)과 아들 동우(박용우)는 연인처럼 친밀하게 지내는 사이. 그런 모자 사이에 수진(최지우)이 나타난다. 진숙은 동우에게 여자가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지만 결혼을 승낙하고, 점점 아들을 향한 집착을 드러낸다. 남편을 향한 시어머니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수진. 남편을 목욕 시켜 주는 시어머니를 발견했을 때, 빨리 도망쳤어야 했는데 조금 늦었다. ‘층계에서 밀어버리기’, ‘머리채 잡고 욕조에 처박기’ 등 수진은 시어머니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후에야 줄행랑을 친다. 아내가 집을 나간 후에야 뒤늦게 어머니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에 짜증을 내는 동우. 이 와중에 실수로 동우가 목숨을 잃고, 아들을 잃은 원망은 며느리를 향해 폭주한다.

 

파국의 시작: 부부의 세계가 단순하지 않은 이유. 남편과 아내 사이가 좋다고 해서 만사 오케이인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부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고부갈등(장서갈등), 즉 시월드(처월드)다. ‘올가미’는 고부 갈등 소재의 시조 격으로 꼽히는 영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역으로 풀어내 대한민국 수많은 며느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넌 내 아들을 위해 사준 장난감에 불과해!”라는 진숙의 대사는 그중에서도 화룡점정. 봉준호 감독은 영화 ‘마더’를 만들 때 “아들은 엄마에게 뱃속에서 10달을 데리고 있다가 내보낸 최초의 이성 아닌가”라고 했디는데, 모자 관계가 가장 기이한 형태로 풀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영화 '바람난 가족' 스틸.


 

[부부의 세계5] ‘바람난 가족’, 느낌 아니까

 

결혼기간: 10년 전후로 추정

아내: 은호정(문소리), 남편: 주영작(황정민)

불화요인: 불륜, 맞바람, 성격차이, 성(sex)문제

상징대사: “하루를 살더라도 솔직하게, 느낌대로 살자”-병한

자매영화: ‘아메리칸 뷰티’

 

사건개요: ‘부부의 세계’ 손제혁(김영민)이 그랬던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남자가 있어. 바람을 피우는 남자와 그걸 들키는 남자”라고. ‘바람난 가족’의 변호사 영작은 두 종류의 남자 중 대차게 들키는 바람둥이다. 이 남자에게 없는 건, 수치심. 있는 건, 뻔뻔함. 다행히(?) 그런 영작을 대하는 아내 호정은 지선우(김희애) 부류의 여자. “본능은 남자한테만 있는 게 아니야”라는 마음의 자세로 호기심 왕성한 ‘고딩’을 유혹, 자기 안의 본능을 깨운다. 제목이 암시하듯 바람난 사람을 또 있다. 영작의 아버지 주창근(김인문)은 15년이 넘도록 아내를 무시하고 외도와 술에 빠져 흥청망청 살아온 인물. 그런 남편이 간암 말기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영작의 어머니인 병한(윤여정)은 초등학생 동창과 바람이 나서 “15년 만에 섹스했다. 생전 처음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아, 콩가루 집안이라고 하기엔 ‘소 쿨(so cool)’하다고 해야 할까.

 

파국의 시작: 오르가슴. 밤이 야속하구나, 호정은 영작과의 섹스에서 연애 때와 같은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 여자, 내 탓 남편 탓 하지 않고 마스터베이션으로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채운다. 섹스에 대처하는 호정의 태도는 17년이 지난 지금 꺼내 봐도 참으로 호방하다. 여성을 향한 한국 사회의 억압된 성 의식 속에서 호정이 보여준 솔직함과 씩씩함은 한국 영화 여성 캐릭터의 또 한 번의 변곡점을 선사했다. ‘남편 말고 애인이 필요해’라는 영화 카피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포스터 속 문소리의 포즈로 인해 개봉 당시 이 영화를 그렇고 그런 선정적인 영화로 오인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실은 가부장 신화에 날카로운 메스를 댄 발칙한 영화였더랬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붙이면 ‘남’이 되는 ‘부부 세계’의 속살까지도.


정시우(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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