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몰아보기

지브리를 타고 돌아가는 인생의 타임리프

2020.04.10

'이웃집 토로로'


2020년 4월을 기점으로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의 모든 작품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스트리밍 시장이 나날이 확장되는 시점에도 “작품이 싸구려 취급받기 싫다”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밝혀왔던 지브리 입장에선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닐 터. 하지만 자금난을 겪어왔던 지브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제작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고, 관객 역시 안방극장에서 편안하게 지브리의 작품을 즐길 수 있게 됐다.

 

1984년 지브리의 전신 ‘톱 크래프트’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개봉한 이래 2016년 ‘붉은 거북’까지 31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이 관객들을 만났다. 30년이 넘는 세월 속에 지브리의 작품들은 각자의 인생작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곱씹게 되는 것이 명작의 조건이라면 지브리의 작품들은 확실히 그 반열에 오름이 차고도 넘친다. 작품 하나하나 마다 그 시절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알알이 담고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울려 퍼진 ‘인생은 회전목마’처럼 지브리의 작품 위에 올라타노라면 우리의 인생은 어린 시절부터 중장년 시절까지 자연스럽게 타임리프 속으로 계속 돌아가고 있다.

 

‘이웃집 토토로’

누구나 메이처럼 귀여운 때가 있었다


인생에 있어 가장 걱정 없던 시기라면 역시 유년 시절이다. 모든 순간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사진으로 보는 어린 시절은 어찌나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지. 그만큼 순수한 순수했기에 무서운 것도 많았다. 혼자서는 잠도 못 자는 때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우리가 무서울 땐 사실 ‘이웃집 토토로’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웃집 토토로’는 시골 마을로 이사 온 11살 사츠키와 4살 메이가 숲의 신 토토로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판타지 드라마다. 의젓하지만 결국 초등학생이었던 사츠키와 천진무구한 메이, 귀염뽀짝한 모양새로 스튜디오 지브리의 마스코트로 자리매김한 토토로는 누구라도 엄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동심의 아이콘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유년 시절로 되돌린다.

 

작품은 모든 곳을 ‘순수’라는 물감으로 어여쁘게 채색한다. 1950년대 농촌 생활은 먼지 가득한 도심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을 말끔하게 씻겨주며, 때 묻지 않은 사츠키와 메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린 시절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비춘다. 마당에 심은 도토리의 싹을 틔워내는 토토로와 사츠키 자매의 만세 삼창은 나이 불문하고 따라할 수밖에 없는 마력의 율동이며, 비를 맞는 토토로에게 건네는 우산은 이 세상 그 어떤 선의보다 아름답게 빛난다.

 

‘이웃집 토토로’는 제작 단계에서 반려를 당한 작품이다. 어른의 시선에서 볼 때 전체적인 스토리에 굴곡이 없었던 것. 덕분에 다카하타 이사오 ‘반딧불의 묘’와 동시상영을 조건으로 제작될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작품을 같이 보면 더 극명한 대비를 느낄 수 있다. ‘반딧불의 묘’가 리얼한 현실 속에 파괴됐던 남매를 그린다면, ‘이웃집 토토로’는 동화 같은 판타지 속 자매를 이야기한다. 각 작품이 서로의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셈이다.


'마녀 배달부 키키'

 

‘마녀 배달부 키키’

장래희망 앞에 놓인 거대했던 물음표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사춘기 시절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근거 모를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었는지, 멋대로 호기를 부리다 세상의 높은 벽에 좌절했으며, 장래희망을 적어 내라는 말에 아직 깨우치지 못한 자신의 적성에 대해 고민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시기라지만 반대로 모든 것이 불확실했기에 불안했고, 그 마음을 아무도 몰라주기에 외로웠을 시절이었다.

 

키키도 그랬다. 13세가 된 이 귀여운 견습 마녀는 진짜 마녀가 되기 위해 1년간의 독립 수행에 나선다. 능력이라곤 빗자루를 타고 나는 것과 고양이 ‘지지’와 대화를 하는 것, 딱 두 가지 뿐. 진짜 마녀가 되기 위한 수행이지만 정착한 마을의 시선이 곱지 않다. 진짜 마녀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과 점차 사라져가는 마법 능력은 10대라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이기에 안쓰러움을 더한다.

 

하지만 결국 키키는 결국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른다. “자신만의 길을 가”라는 화가 언니 ‘우슐라’의 말처럼, 좋아하는 소년 ‘톰보’를 구한다는 자신만의 목적이 생겼을 때 한 단계 더 성장해간다. 10대는 어른이 아니다. 남들의 눈에 비추면 한없이 모자라고 미약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매 순간 자신을 다그칠 필요는 없다.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 자연스레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을 키키의 성장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사실 ‘마녀배달부 키키’는 가타부치 스나오라는 신인 감독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투자자가 감독의 이름값에 반대 의견을 냈고,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전면에 내세우게 됐다.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했고, 가타부치 스나오가 연출 보조로 힘을 실었기에, 이전에 보여줬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무거운 주제의식이 빠져있다. 하지만 43억엔의 흥행 수익을 올리며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등 잇단 흥행에 실패했던 스튜디오 지브리가 반등하는 계기를 만들면서 흥행 신화의 시작점이 됐다는 게 아이러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성년자 딱지를 떼며


20대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성인이 된 기쁨을 만끽한다. 미성년자라는 딱지를 땠을 때 다가왔던 신세계는 처음 마셔보는 술 한 잔처럼 쓰면서도 달콤했고, 몽롱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과도한 음주는 다음날 숙취를 부르듯 20대가 늘 즐거운 건 아니다. 성인이란 결국 독립을 뜻한다. 부모 곁을 떠나기 위한 준비 신호가 이미 울려 퍼졌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치히로의 반강제 독립기다. 치히로는 마법에 걸려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유바바의 온천에서 일을 시작한다. 비록 10세 소녀였지만 욕탕 청소부터 시작하는 고군분투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20대의 모습과 같다. 온천에서 일하는 많은 이들이 고유의 이름과 모습을 잃어가지만 치히로는 그 과정을 이겨낸다. 사회생활과 함께 자신의 비전을 오롯하게 이뤄내자는 20대를 위한 응원가인 셈이다.

 

돼지로 변한 부모와 무분별한 포식 요괴 가오나시, 탐욕의 상징 유바바를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이제 막 사회의 경제구조에 소속된 20대에겐 하나하나가 소중할 메시지다. 또한 치히로의 동아줄인 노란색 운동화와 진짜 이름은 어디서든 자기 자신의 본질과 초심을 잊지 말라는 또 하나의 파이팅으로 다가온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명실상부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52회 베를린 영화제는 역대 두 번째로 애니메이션에 황금곰상을 안겼으며, 75회 아카데미 역시 장편애니메이션 작품상을 선사했다. 흥행 성적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308억 엔으로 일본 역대 흥행 수입 1위를 20년째 유지 중이다. 2위는 ‘타이타닉’으로 262억 엔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하울의 움직이는 성’

진정한 아름다움에 눈을 뜨다


20대의 사랑이 뜨겁다면, 30대의 사랑은 따뜻하다. 미래를 함께할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갖고, 가정을 이룬다. 가장 아름다웠을 20대를 지나 30대를 살아가며 점차 나이를 먹는 외모가 슬플 때도 있지만, 외면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아는 노련함도 생겼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도 바로 그런 현명한 여성이었다.

 

작품 초반 히사이시 조의 대표곡 ‘인생은 회전목마’와 함께 하울과 소피가 공중을 걷는 모습은 마치 웨딩마치에서 행진을 하는 듯한 로맨틱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하지만 소피가 마녀의 저주에 의해 90대 할머니로 변해버리는 모습은 충격과 공포를 안기기에 충분하다. 허나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걸, 하울과 소피는 알고 있다. 외견과 상관없이 자아를 찾아가고 사랑을 키워가는 모습은 보다 견실한 사랑을 꿈꿨던 30대의 사랑과 닮아있다.

 

자의보다는 타의로 살고 있던 소피는 할머니로 변해서야 자신만의 가족을 만난다. 하울과 그의 제자 마르클, 허수아비, 그리고 설리번의 강아지 힌까지, 소피를 중심으로 진정한 가정이 만들어지고, 그들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안에서 행복을 피워낸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 드물다는 로맨스물이며, 열린 결말 없이 해피엔딩으로 문을 닫는 소피와 하울이기에 더욱 소중한 작품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본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연출 아래 시작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의 손에서 마무리 지어졌다. 특이한 것은 하울의 목소리를 유명 배우 기무라 타쿠야가 연기했다. 기무라 타쿠야가 지브리의 팬인 딸들을 위해 먼저 출연 요청을 했고, 오디션도 없이 바로 채용했다. 평소 신인이나 연극 배우를 쓰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습관에 비춰 보면 역대급 파격 캐스팅이었다.


'붉은 돼지'

 

‘붉은 돼지’

내가 얼굴이 돼지지, 마음이 돼지냐?


정신없이 달려온 40대는 몸도 마음도 조금 지쳐있을 시기다. 멈추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자신을 채찍질하지만 삶이란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다. 반복되는 일상에 목적을 잃기 십상이고, 나보다는 가족을 위해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붉은 돼지’의 연출 메모에 한 마디를 적었다. “지쳐서 뇌세포가 두부가 된 중년 남성을 위한 만화영화”라고.

 

주인공 ‘마르코 파고트’는 제목 그대로 돼지다. 본래 인간이었지만 사정에 의해 돼지가 됐다. 40대로 넘어가며 예전과 달라진 자신의 몸매와 비교해보면 웃음부터 나온다. 허나 돼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마르코는 낭만을 아는 그 누구보다 멋진 돼지다. 비행기를 사랑하고, 타인의 마음을 배려하며, 정의로우며 파시즘과 전쟁을 싫어한다. 심지어 로맨티시스트다. 누가 이 돼지를 싫어할 수 있을까?

 

오래도록 회자되는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라는 명대사는 매너리즘에 빠져있을 자신을 향한 위로이자 각오다. 자신의 로망을 펼칠 줄 아는 마르코는 이 작품을 대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닿아있다. 비행기 공장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영향에 따른 비행에 대한 애정을 멋진 파일럿들과 비행기 장인들, 그리고 비행신에 고스란히 담았다. 노장은 나이를 먹어도 식지 않는 덕심이 인생을 뜨겁게 달구는 재료가 된다는 걸 몸소 보여준다.

 

배경이 이탈리아이기에 지브리 작품 중에서도 유독 서구권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작품이다. 무엇보다 해외 버전 성우들의 면면이 화려한데, 프랑스어 버전에선 장 르노가 마르코를 연기했다. 또한 북미 버전엔 팀버튼의 ‘베트맨’ 시리즈의 배트맨,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빌런 ‘벌처’로 유명한 마이클 키튼이 목소리를 맡았다.


권구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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