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스플레인

아버지가 따라준 첫 술잔

'이태원 클라쓰'가 소환한 추억!

2020.02.19

사진제공=JTBC



“소주 맛이 어떠냐?”

“달아요.”

“그건 오늘 하루가 인상적이었다는 거다.”

 

아들은 전학 간 첫날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아버지는 회사를 관뒀다. 대폿집 술상 앞에 마주앉은 부자는 그렇게 소주 한 잔으로 고된 하루를 정리한다. 아버지는 이야기한다. 술은 아버지한테 배우는 거라고. 아직 소년은 처음 맛 본 소주에서 어렴풋이 인생의 맛을 느꼈을 것이다.

 

JTBC 금토드라마 '이태원 클라스'(극본 조광진, 연출 김성윤)의 주인공 박새로이(박서준)처럼 나도 아버지에게 술을 배웠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아버지와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고,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엔 골뱅이 무침과 맥주를 마시는 것이 우리 가족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20대 나는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고, 동시에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제법 세상을 알아가고 있고 매우 진지한 토론을 했다고 자부했지만, 아버지 눈에는 그저 귀여울 따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술을 마시게 된 것이, 정확히 자식이 어느덧 자라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 낯설고도 신기하지 않았을까.


사진제공=JTBC

 

2020년 1월 1일, 새해를 맞으며 우리 집은 작은 이벤트를 열었다. 삼남매 중 큰딸이 공식적으로 음주 가능한 나이가 되어 조촐한 파티를 연 것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태어난 해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을 한 병씩 사두었다. 그리고 아이가 스무 살이 되는 날 와인을 따기로 했다. 사실 사면서도 반신반의했다. 과연 이 와인을 딸 날이 올 것인가. 초등학교 다니는 저 아이가 나와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그날이. 그리고 그때쯤 나는 또 어떤 모습일까. 다양한 기대와 상상, 호기심과 더불어 와인은 와인셀러 구석에서 긴 잠에 들어갔다. 사실 가장 큰 걱정은 이 와인이 20년 가까운 세월을 이겨낼 수 있을까였다. 유럽 어느 성 지하의 와인저장고도 아닌 허술한 와인셀러에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새해 우리 가족은 ‘드디어’ 와인 뚜껑을 열었다. 그 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사실 와인 맛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명목은 큰딸이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 의미는 다른 데 있을지도 몰랐다. 그것은 한 아이를 세상에 내놓고 이만큼 키워낸 남편과 나의 감사와 안도였을 것이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기쁨, 분노와 좌절. 누구나 처음부터 부모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기에 우리 부부는 많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우리 부부는 아직 부모로서 경험해야 할 ‘처음’이 많이 남았을 것이다. 이제 막 어른이 되어 더 큰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갈 큰딸 못지않게 겪어야할 노심초사가 얼마나 많을지.

 

엄마 없이 아들을 혼자 키운 박새로이의 아버지도 아마 아들과의 술자리가 그 누구보다 뿌듯했을 것이다. 언제 이렇게 자라 소신을 지킬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까. 물론 좋은 날이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었겠지만. 그는 아들의 삶이 굴곡 없고 순탄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처럼. 부모가 자식에게 따라주는 술잔에는 그렇게 오만가지 바람과 대견함,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 더불어 술친구가 생겼다는 기쁨 몇 방울, 또한 때로 술에 기댈 수밖에 없는 순간을 겪게 될 어른이 된 자식에 대한 위로 몇 방울까지.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식은 다시 부모가 되어 같은 바람을 담아 자식의 잔에 술을 채워주는 날이 올 것이다.

 

가정을 가진 뒤로 아버지와의 제대로 된 술자리를 가진 지 오래다. 명절 때나 생신 때 간혹 약주를 권하긴 하지만 이제 연세가 높으셔 예전만큼 술을 즐기시지 않는다. 가끔씩 혼자 술을 사들고 친정에 달려가고플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옛날처럼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려보고 싶다. “아버지도 참, 사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귀띔이라도 좀 해주지…” 하긴, 그때 그렇게 말씀해주셨다 한들, 단거리 폭주족처럼 날뛰던 그 시절 내가 이 긴 마라톤 같은 여정을 이해나 했을까….


이제 막 소주 맛을 알기 시작한 큰아이도 언젠가 자식의 잔을 채워주는 날이 오겠지. 그때 나와 함께 했던 술자리를 기억해줄까.


이현주(칼럼니스트, 플러스81스튜디오 이사)





목록

SPECIAL

image NCT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