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넷플릭스의 ‘영화’

2019.12.19
‘행복한 라짜로’, ‘아이리시맨’, ‘결혼 이야기’, ‘카우보이의 노래’.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 주최한 ‘디렉터스컷 어워즈 스페셜 토크 : 디렉터스 체어’(봉준호, 김보라, 이지원, 강형철, 이병헌 감독 참석)에서 감독들이 꼽은 ‘올해의 영화’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넷플릭스 영화다. 첫 오리지널 영화 '비스트 오브 노 네이션'으로부터 불과 4년 만에 넷플릭스는 영화인들이 가장 주목하는 작품을 전부 만드는 제작사로 성공한 것이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출발한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의 영화 진출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2년 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봉준호 감독의 ‘옥자’는 프랑스 극장협회로부터 “개봉 3년 뒤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는 영화만이 영화제에 초청받을 수 있다”는 공식 성명서를 받았고, 이에 넷플릭스는 출품을 거절했다.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 역시 같은 이유로 칸국제영화제에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로마’가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고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까지 차지하면서 넷플릭스는 거장 감독의 작가적 비전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꿈의 기업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여기엔 넷플릭스와 협업한 감독들의 증언도 중요한 근거가 됐다. ‘옥자’를 만든 봉준호 감독은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넷플릭스는 스필버그처럼 신 대접을 받는 필름메이커들만이 받을 수 있는 최종 편집권 등 완벽한 자유를 보장했다”고 말했고, 넷플릭스와 영화 ‘피노키오’를 준비 중인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10년 동안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할리우드의 모든 스튜디오가 거절했다. 이건 ‘카우보이의 노래’를 만든 코엔 형제나 ‘로마’를 만든 알폰소 쿠아론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한다”(‘콜라이더’)고 전한 바 있다.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를 젊은 시절 모습으로 되돌리고 러닝타임이 209분에 다다르는 작품, ‘아이리시맨’에 1억 5천 9백만 달러를 투자할 회사도 전 세계에 넷플릭스뿐이다.

이들 작품이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주목받으면 넷플릭스 영화의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한 거장들의 예술적 비전을 전폭 지원하면서, 혹평에 시달린 ‘브라이트’ 등 자체제작 영화들의 흑역사를 청산한 넷플릭스는 빠른 속도로 대중과의 접점도 넓혔다. 가령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결혼 이야기’는 완성도도 높지만 누구나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마이클 베이의 ‘6 언더그라운드’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선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오락 영화에 주력해온 그의 최근작 중 가장 관객 반응이 우호적이다. 이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도저히 제작비를 대지 않는 마이너한 영화이기 때문에 넷플릭스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 지난해 몇몇 작품들과 경우가 다르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올해 넷플릭스 영화에 대한 반응이 뜨겁고 관객과의 관계가 가까워졌다”고 평가했다. ‘옥자’ 당시에는 업계 동향을 조심스레 살피던 영화제작자들도 최근엔 넷플릭스 영화에 우호적이다. JK필름 길영민 대표는 “투자배급사가 많이 생기면서 기회는 많이 생겼지만, 한편으로 극장 영화 간 경쟁은 매우 치열해졌다. 텐트폴 아니면 흥행이 힘들다. 그래서 제작사 입장에서는 관객수에 따라 수익이 결정되지 않는 넷플릭스가 제작비를 운용하는 합리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보인다”고 평가했다. 한편 제한 개봉 형태이지만 극장 상영도 전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는 최소한의 극장 상영 일수를 요구하는 영화제 출품 기준을 맞추기 위한 이벤트를 넘어서서 극장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관객층을 포섭하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아이리시맨’은 국내 메가박스 일부 상영관이나 명필름 아트센터에서 만날 수 있다. 심재명 대표는 “명필름 아트센터는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가 지원되는 특별관이다. 그리고 넷플릭스는 돌비 애트모스로 만든 영화를 제작한다. 특정 상영관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되는 작품을 넷플릭스가 의도적으로 만들고 있다. 이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보는 이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이들 모두를 겨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이원화된 배급 형태는 단 1년 만에 산업에 정착했고, 가장 전통적인 영화를 지향하는 창작자가 선택하는 최선이 되기도 한다. 마틴 스콜세지는 “간섭을 받지 않고 원하는 대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투자를 받을 수 있다면, 스트리밍과 극장 상영을 병행하는 법을 선택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기회였다”(‘가디언’)고 말했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가져올 영화계 지각변동을 낙관적으로만 보는 건 아직 섣부르다. 익명을 요구한 영화제작자는 “넷플릭스의 핵심은 글로벌이다. 기존의 국내 통신망과 달리 세계 시장으로 갈 수 있는 다이렉트 창구가 된다는 건 굉장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명망 있는 감독에게만 기회를 주고 신인감독에 대한 리스크는 부담하지 않는다. 아직 한국 영화인들에겐 진입장벽이 높은 플랫폼 같다”는 의견을 밝혔다. 더군다나 최근 넷플릭스가 극장 사업을 시작한 것은 콘텐츠 시장 독점에 대한 우려를 불피운다. 최근 넷플릭스는 뉴욕 소재의 ‘파리 극장’을 장기 임대하기로 결정했다. 71년 역사를 자랑하며 뉴욕의 유일한 단일관(581석)으로 남은 이곳에서, 넷플릭스는 본격적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 극장 상영을 하고 마케팅 이벤트를 열 예정이다. 넷플릭스는 지난해부터 로스앤젤레스의 ‘이집트 극장’ 인수도 추진하고 있는데, 이 역시 성사된다면 미국 동·서부에 모두 자사의 극장을 소유하게 된다. 최근 미국은 1948년 대법원 판결 이후 지속됐던 ‘파라마운트 판결’(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자신들이 소유한 극장에서 자사 영화를 틀 수 없도록 하는 조항) 때문에 한국에서와 같은 투자배급사-극장 수직 계열화 독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1948년 미국 대법원 판결 이후 지속됐던 이 조항을 최근 없애자는 논의가 있었다. 넷플릭스가 제작사와 극장 간 ‘수직적 통합’을 시도한다면, 그리고 그 기회가 소수의 이름값 있는 감독에게만 주어진다면 오히려 콘텐츠 다양성을 해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디즈니, 아마존, 애플 등 다수의 공룡기업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거나 준비하고 있다. 넷플렉스의 독주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확신할 수 없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이른바 ‘토종 OTT’ 플랫폼들이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겠다고 밝혀 시장의 움직임은 더욱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길영민 대표는 “OTT 플랫폼들이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결국 극장도 OTT 플랫폼도 변화하며 이 시장이 많이 바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극장이 아예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밝혔다. 예컨대 “극장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극장이 기술적으로 더 발전할 수”(심재명 대표) 있다. 영화계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아닌 OTT 플랫폼으로 주도권이 넘어가 산업이 완전히 재편되는 시점이 온다면 분명 영화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영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말은 이 같은 지각변동은 영화사에서 늘 있었던 일임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고, 근본적으로는 이야기의 본질을 상기케 한다.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바뀔 때 사람들은 영화가 끝났다고 말했다. TV가 등장했을 때 역시 사람들은 영화가 끝났다고 했다. 블록버스터 영화를 비디오로 볼 수 있게 됐을 때 역시 사람들은 영화가 끝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는 끝나지 않고 변할 뿐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해야 할 의무가 있고,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하고픈 이야기의 야심 그리고 우리가 이를 말해야만 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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