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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수자의 삶, 매일의 작은 승리

2019.12.09
대한민국 여자 어린이라면 으레 그렇듯 나 역시 학창 시절에 삼국지 게임을 즐겼다. 당시 삼국지는 유비, 조조 등 수장이 되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제 편과 진도, 장료 등 장수의 시점에서 주어진 일을 해내며 나라에 기여하는 장수제 편으로 나뉘었다. 이 중 내가 가장 좋아하여 몇 번씩 반복했던 게임은 대표적인 장수제 편인 삼국지 8이었다. 막연한 국가 운영과 삼국 통일보다는 일기토 이기기, 분실물 찾아주기 등 눈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물론 멋진 여성 캐릭터와 연애 후 결혼이 가능한 것도 큰 장점이었다. 심지어 약간의 조작으로 여성 캐릭터 간의 동성혼도 가능했다. 나를 서방님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최근 성미산학교에서 성 소수자의 삶에 대해 강연을 했는데, 질의응답 시간에 한 남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 "퀴어로 살다 보면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절망감이 들어요. 이럴 땐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야 할까요?" 어떤 배경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는지 짐작이 갔다. 11월은 퀴어들에게 유달리 속상한 한 달이었다. 차별 행위에서 성적지향을 빼자는 개정안이 발의 되었으며, 대국민 담화에서 동성혼을 합법화하기에는 아직 사회적 합의가 되지 않았다는 발언이 나왔고, 가족 다양성 정책 토론회에서 동성애 관련 내용을 제외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한 달이었다.

고민 끝에 내가 그 학생에게 한 대답은 구체적이고 작은 승리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기후 변화, 성차별, 퀴어 혐오 등 세상에는 거대한 악이 너무나도 많다. 이것들을 내가 직접 모두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시작하기 전에도 지치는 법이다. 하지만 내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 우리 아빠랑 남동생이 하는 불편한 말 등보다 사소한 악으로 시야를 좁히면 작고 소중한 내 손으로도 비벼볼 만하다고 느껴진다. 내 일상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니 더 동기부여가 되고, 변화를 즉각적으로 관찰할 수 있어서 빠르게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와이프와 결혼을 결심한 초반에 들었던 생각은 "혼인신고가 되도록 국가에 소송이라도 걸어야 하나?" 였는데, 10분쯤 고민하다 포기했다. 일개 월급쟁이가 국가와 싸우다니, 앞으로 미래가 불행할 것 같았다. 하지만 회사에 결혼 혜택을 받는 건 해볼 만하다고 느꼈다. 선례는 없었지만, 경조금을 지급하기 위해 사원들의 합의를 얻어오라고 할 것 같지도 않았고, 외국계 회사라 최악의 경우 본사에 메일을 쓰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팀 전무님을 만났을 때 "여자친구랑 곧 결혼하는데 저도 경조금이랑 휴가 나오죠?"라고 물어봤고, 내 신청 서류는 승인되었다. 휴가 6일과 50만 원 어치의 작지만 값진 승리였다. (혹시 전무님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본사에 메일 보내는 부분은 농담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호탕한 성격과 멋진 미모를 자랑하는 우리 막내 이모는 독실한 기독교인인데, 그가 다니는 곳의 교리 중 하나가 동성애자 박해하기로 추정된다. 내 부모님을 포함하여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종종 동성애자가 왜 지옥을 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토론을 주최하시곤 했기 때문이다. 저 멀리 앉아있는 조카가 지독한 레즈비언인 줄은 모르고 한 말이었지만. 하지만 나는 이모를 좋아하고, 내 결혼식을 축하해줬으면 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전통적 가치인 효(孝)를 활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화를 걸었다. “이번 추석에는 동성 지옥 얘기 안 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제가 레즈비언이라 부모님이 상처받았을 거에요. 저 곧 여자친구랑 결혼하는데 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죠?” 비관적이었던 내 예상과 달리, 이모는 나와 내 결혼생활의 행복을 빌며, 축의금으로 그 진정성을 증명하셨다. 혐오 세력과의 치열한 한 판이었다.

이렇게 조금씩 작은 승리를 쌓아가고 있지만, 실은 나도 눈을 뜨면 갑자기 동성혼이 법제화되어 있으면 좋겠다. 내 이름으로 쌓인 대한항공 마일리지가 꽤 많은데, 내년 유럽 여행 때 와이프의 좌석을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시켜주고 싶다. 하지만 손 놓고 가만히 있고 싶지는 않다. 유비처럼 백성들을 서주에서 구할 수는 없을지라도, 진도처럼 묵묵히 전장에서 할 일을 다 하고 싶다. 아니, 집 앞 도로의 눈을 치우는 백성 A라도 좋다. 나를 보고 백성 B, 백성 C도 함께 눈을 치우다 보면 언젠가 달구지를 끌고 갈 정도로 길이 정비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작은 싸움을 이겨내고, 승리했다는 걸 모두에게 알리고 싶다. 이렇게 해보니 되더라고, 동성애자로 살아도 즐겁더라고. 그리고 몇 년 뒤 언젠가 성미산학교의 그 남학생과 사회가 변하긴 하더라, 살다 보니 달라지더라는 얘기를 나누고 싶다.

김규진
29세. 대한민국 국적 유부녀 오픈리 레즈비언. 한국에서 동성 간 혼인신고는 어렵다고 하길래, 일단 회사에서 경조금이라도 받아내기로 했다. 왜 아무도 나에게 레즈비언으로 잘사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나 고민하다, 내 얘기부터 공유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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