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만이 우리를 구원해주리라

2016.08.22
띵동. 거리를 걷던 모든 이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국민안전처에서 보낸 긴급재난문자였다. 물론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폭염 경보. 낮 동안 노약자, 어린이 등 야외활동 자제. 충분한 수분 섭취, 물놀이 안전 등에 유의하세요.’ 문자의 내용은 이미 그들이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으니까. 물론 노약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물놀이를 간 사람은 더더욱 아닌 경우가 많았지만, 어쨌든 이러다 죽겠구나 싶은 더위였으니까. 알면서도 나와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자는 아무런 경보도 예방도 되지 못했다. 그저 바라건대, 이 외출의 목적이 무엇이고 그 목적지가 어디든, 에어컨의 손길이 닿는 곳이길, 그저 그곳에 빨리 도착하길 바랄 뿐이었다. 부디 어서 우리를 도와주소서.

언제부터 대중들이 에어컨에 경외를 품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모든 영웅이 그러하듯, 에어컨의 탄생 설화는 명확하다. 그의 아버지는 윌리스 캐리어, 역사에 남을 공학자였다. 그에게 주어진 숙제는 더운 여름, 고온과 습기 때문에 인쇄소의 잉크노즐에 생기는 문제를 막는 것이었다. 그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떠올렸다. 인쇄소를 서늘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위대한 캐리어는 물질이 고체-액체-기체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열을 흡수하는 원리를 이용해 에어컨 마크1을 만들어냈다. 기계를 냉각시키는 에어컨의 마법은 파격적이었지만 그것이 가져온 파장은 아직 미미했다. 당시의 에어컨은 말하자면, 초능력은 발아했지만 아직 메트로폴리스로 나가지 않은 스몰빌의 클라크 켄트와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캐리어는 천재적이고도 위대한 발상을 한다. 에어컨의 능력을 인류 보편을 위해 발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이 뛰어난 천재도 에어컨 스스로도 자신들이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는 미국 백악관에 입성해 세계 최고의 권력자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던 순간에조차 미처 몰랐을 것이다.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는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고 일갈한 바 있다. 빨래에 드는 시간을 4시간 40분에서 40분으로 줄이고 노동 강도 역시 거의 없는 수준으로 줄이면서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본격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는 이유다. 이것은 그동안 저평가된 에어컨의 활약상에도 그대로 대입할 수 있다. 에어컨이 처음으로 활동했던 뉴욕의 인쇄소는 여름의 무더위만 걱정하면 됐지만, 세상에는 동남아시아처럼 그보다 심한 무더위를 1년 내내 견뎌내야 하는 지역들도 있다. 인간도 기계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환경. 에어컨의 상륙은 이들에겐 말 그대로 구원자의 등장과도 같았다. 에어컨의 진정한 가치를 가장 먼저 꿰뚫어본 건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였다. 그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만 일할 수 있는 열대기후의 한계를 해결해줄 힘이 에어컨에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라면 타는 듯한 한낮에도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리콴유는 에어컨이 싱가포르 발전에 가장 중요했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 산업의 역군이 된 에어컨. 미국의 중산층을 위한 마술쇼로만 생각되던 에어컨의 능력이 비로소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생산적인 능력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에어컨이 등장한 이후 더위와 관련한 질병사망률은 그 이전과 비교해 40%나 내려갔다. 손쓸 도리가 없었던 병자들의 욕창 문제 역시 에어컨이 개입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다. 20세기 초부터 1세기 동안 에어컨이 인류사에 이룬 업적은 재평가할 가치가 충분하다. 물론 여전히 그를 인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있었지만.

에어컨의 성과를 폄하하는 이들의 논리는 다양하다. 에어컨의 능력이 발동하기 위해 너무 많은 전력을 소비해야 한다는 것, 역기능으로 열섬현상이 생긴다는 것, 에어컨이 주는 쾌감에 취해 자칫 냉방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 제일 더운 날을 피해 휴가를 가면 될 일이라는 것. 마지막 말을 빼면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에어컨의 도움이 인류에게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다. 말하자면 에어컨의 도움을 받아 조금 더 편해질 수는 있을지언정 없다고 문제 될 건 없다는 생각. 특히 어릴 때부터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한 걸 국가적 자랑으로 가르치는 한국에서는 더더욱 여름의 더위에 대항하는 에어컨의 노력을 자연에 거스르는 것처럼 폄하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사망자 3,000여 명을 남기며 역대에 손꼽힐 폭염을 기록한 1994년 다음 해인 1995년, 에어컨의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던 것처럼, 이러다 죽을 것 같은 더위를 경험한 이들에게 에어컨이 도와주고 말고는 생존의 문제가 된다. 1994년 이후 최고의 더위를 기록 중인 지금 에어컨이 가장 인기 있는 슈퍼스타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이 더위로부터 우릴 구해주는 것은 누구인가. 세상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긴급재난문자를 보내는 국가안전처? 에어컨의 도움으로 여름을 겨우 이겨내는 이들에게 세금 폭탄을 안기는 정부? 에어컨의 능력을 극한으로 몰아붙여 만든 추위 속에서 겨울옷 수준의 두꺼운 옷을 입고 자기만의 겨울왕국 만찬을 즐기는 대통령? 오직 에어컨만이 우리를 구원해주리니, 그러니까 더 내려줘 전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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