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 제법 날카로운 이방인의 자극

2016.03.16
[빛의 제국]
한·불합작 창작 초연│2016.03.04 ~ 03.27│명동예술극장 
원작: 김영하│각색: 발레리 므레장·아르튀르 노지시엘│연출: 아르튀르 노지시엘│번역: 길혜연│배우: 지현준(김기영), 문소리(장마리) 
줄거리: 별 볼 일 없는 영화수입업자 기영은 대학에서 만난 마리와 결혼해 서울에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이다. 하이네켄, 축구 그리고 스시 마니아인 그는 이미 10년이 넘게 끈이 떨어진 ‘잊혀진 스파이’로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평양에서 보낸 것으로 보이는 의문의 이메일 한 통을 받는다. ‘모든 걸 버리고 24시간 내에 귀환하라.’ 서울에서의 인생을 청산하며 단 하루 동안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사는 남자 기영과 이전과 같은 듯 다른 하루를 보내는 여자 마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 제법 날카로운 이방인의 자극 
[빛의 제국]은 원작 소설 자체가 남북 관계와 스파이라는 존재를 일상에 녹여내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연극 역시 ‘충돌과 갈등의 역사 속에서 개인은 어떤 영향을 받는가’라는 질문을 고스란히 따른다. 다만, 이 질문에 답하는 이들이 ‘프랑스인’이고, 이것은 연극 [빛의 제국]을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다. 많은 것이 익숙함과 생경함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관극이 쉽지는 않다. 소설의 1/3가량을 차용한 연극은 정적이고, 뒤죽박죽 섞이고 생략된 이야기에서는 갈피를 잡기 어렵다. 하지만 이방인의 시선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게 한다. 

Direct: 익숙함과 생경함 사이의 어떤 것 
경계와 기억은 아르튀르 노지시엘 표 [빛의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다. 그는 소설 속 남북의 분단과 부부의 불통 위로 무대와 영상, 허구와 현실, 배우와 배역, 과거와 현재, 액션과 리액션 등 다양한 경계를 꺼내놓는다. 무대에는 공간적 배경을 설명하는 세트 대신 거대한 두 개의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이곳에는 서울의 곳곳과 클로즈업한 배우들의 영상이 투사된다. 출근 준비 중인 영상 속 마리를 향해 무대 위 기영은 “나 출근한다”고 말하고, 기영은 마리에게 자신의 지난 삶을 영상과 무대 양쪽에서 고백한다. 현재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기영과 마리는 종종 과거를 기억해낸다. 배우들은 상대 배역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내레이션을 하고, 배역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객석에 던지기도 한다. 연출은 하나의 기승전결을 뚜렷하게 전시하기보다는 조각처럼 부유하는 다양한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펼쳐놓고, 무엇과 무엇 사이의 미세한 틈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다른 한켠으로는 한국인들이라면 모두에게 익숙할 [똘이 장군]·이승복·반공 포스터 등 배우 개인이 경험한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관객과 공유하며 현재의 대한민국과 개개인이 처한 현실을 다른 눈으로 보도록 이끈다. 문장 그대로 “오늘은 어제와도 달랐고 어제 이전의 그 어떤 날과도 달랐다.”

Actor: 비극성을 지운 지현준과 문소리의 안전한 착륙
연출가는 배우들에게 기술로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아닌 개개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길 요구했다. 각 배우에 대한 뚜렷한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은 외국 연출가 덕분에 배우들 역시 잠재된 가능성을 내비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쉽지 않은 역할이 많이 주어진다”는 문소리와 공연계에서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배우로 자리 잡은 지현준이 보여주는 간극은 제법 크다. 특히 지현준은 자신의 장기를 모두 지우고 최소화된 움직임과 낮은 목소리로 ‘유령’과 다름없는 김기영의 삶을 표현해낸다. 프랑스에서 온 연출가는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이동, 감정의 고조를 표현하는 영상과 서서히 흔적을 지우는 조명 등을 통해 배우의 뒤를 단단히 받쳐주며 상황에 걸맞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냈다. 배우들의 만족도는 어떤 공연보다도 높고, 관객들은 배우의 새로운 모습에 매혹된다.

Crash: 새로움은 충돌에서 시작된다
연극은 뮤지컬에 비해 레플리카 프로덕션의 비중이 낮아 해외 스태프들과의 협업 기회가 적고, 아직까지는 국립극단·예술의 전당·LG 아트센터 등 큰 단체 위주의 작업이 대부분이다. 그중에서도 국립극단은 2011년부터 매해 2~3편 이상의 작품을 소개해왔는데, 특히 토니 그래함(영국·연출), 니스 몸 스토크만(독일·극작), 펠릭스 알렉사(루마니아·연출) 등 유럽 크리에이터들과의 공동창작이 잦다. 한국의 관계자들과 관객이 최근 공연된 영국 연출가 존 티파니의 [렛미인]을 포함해 유럽 크리에이터들과의 협업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한국적 뜨거움’의 실체다. 기승전결이 확실한 스토리와 빠른 전개, 극단적 상황과 강하고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감정의 연기. 그리고 이 실체가 한국 연극, 나아가 한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현실인식.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권의 충돌이 전혀 예상치 못한 어떤 것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들의 객관적 관찰기가 제법 흥미롭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다수의 휩쓸림에 지친 이들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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