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크러쉬가 뭐길래

2016.03.10
네이버 지식인에는 이런 질문이 있다. “좀 세 보이는 여자보고 걸크러쉬 거리는데 뭔 뜻인가요? 여자랑 맞짱 뜨면 다 깨부순단 뜻이에요?” 엉뚱한 오해지만, 걸크러쉬의 의미를 알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백지영과 치타는 ‘걸크러쉬’ 프로젝트를 통해 ‘사랑이 온다’라는 곡을 발표했고, 지난 2월 4일 방송된 KBS [해피투게더 3]는 김숙과 송은이·이혜정·거미·공현주 등 딱히 교집합이 없는 스타들을 한데 묶어 ‘걸크러쉬 특집’을 꾸몄다. 최근 마마무가 발표한 첫 번째 정규앨범 [Melting]에도 게임 [이니시아 네스트: 황혼의 침묵]의 OST였던 ‘Girl Crush’라는 곡이 수록돼 있다. 걸크러쉬라는 단어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대부분 자의적으로 해석되거나, 아무런 맥락 없이 사용된다.
 
여성 래퍼들을 전면에 내세운 Mnet [언프리티 랩스타], ‘남장여자’ 콘셉트를 소화한 마마무 등의 성공으로 걸크러쉬 현상은 하나의 유행이 되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것을 지칭하는 이 단어는 지금, 사용하지 않는 여성 연예인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효과적인 홍보문구다. 나인뮤지스와 포미닛, EXID, 투아이즈, 멜로디데이 등 걸 그룹은 물론 최강희나 박수진·김희애 등 여배우들도 걸크러쉬라는 말로 마케팅된다. 울림엔터테인먼트의 이중엽 대표가 “처음 러블리즈를 만들 때 우리 A&R 이사와도 그런 얘기를 했다. 팬덤이 있는 팀을 만들자, 그러려면 여성 팬을 공략해야 한다”([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고 말할 정도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제작자들 역시 소비자로서 여성들의 영향력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여성 팬들은 존재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며 좁아진 시장 안에서 주로 마니아층을 형성하는 이들의 존재감은 더욱 부각되었고, 여성 스타와 여성 팬의 관계에 주목하는 시선들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그동안 수많은 매체와 미디어는 여성 간의 관계에 대한 근거 없는 고정관념을 재생산해왔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고, 예쁜 여성은 다른 여성들의 질투를 받기 마련이며, 여성들 사이에는 단순한 우정이나 시기 외에 다른 감정이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 걸크러쉬라는 단어의 등장은 이러한 편견이 애초에 틀렸음을 비로소 증명하지만, 여성 간의 호감에 대한 몰이해는 여전하다. [톱스타뉴스]는 걸크러쉬에 대해 “예쁜 여자를 보면 무조건 질투하고 시기하던 과거와” 달라졌다고, [조선일보]는 “‘여자의 적은 여자’는 이제 틀린 말”이라고 분석했다. 대부분 제시나 치타처럼 진한 메이크업을 하고 소위 ‘세 보이는’ 여성에게만 ‘걸크러쉬’라는 수식어를 붙이는가 하면, 이들의 스타일을 다루며 ‘걸크러쉬 메이크업’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지난 2월 25일 열린 마마무의 쇼케이스에서는 “지난번 남장여자 콘셉트로 걸크러쉬를 일으켰는데, 이번에는 남성 팬들을 공략할 방법이 있냐”는 질문이 등장했으며, 마마무는 “남성 팬들이 조금씩 많아지고 있는데, 이번 뮤직비디오나 재킷사진을 보면 많이 예뻐졌으니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말하자면 현재 걸크러쉬는, 남성에게는 인기가 없을 것처럼 보이거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쁘지 않은 여성 연예인을 가리키는 말처럼 활용된다. 가부장적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전시키는 코미디로 ‘숙크러쉬’라는 별명을 얻게 된 김숙조차 [해피투게더 3]에서 공현주를 가리켜 “일단 예쁘면 (걸크러쉬) 최하위권”, “너무 사랑이 넘쳐. 너무 여자여자해”라는 말로 걸크러쉬에 대한 오해를 드러냈다. 내숭 떨지 않고, 예뻐 보이려 하지 않는 것이 곧 걸크러쉬를 일으킨다는 편견이 생기자 생뚱맞게도 걸크러쉬는 ‘개념녀’ 같은 의미와 아슬아슬하게 맞닿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던 마마무의 곡 ‘Girl Crush’는 매력적이고 애교 넘치고 돈도 충분히 버는 데다 잘 놀지만 “다른 여자들의 고민과는 좀 달라” ‘밀당’ 같은 건 하지 않는 쿨한 여성에 관한 것이고, 제이스와 키썸은 지난해 ‘걸크러쉬’라는 말로 자신들을 홍보하면서도 실체 없는 ‘김치녀’를 저격하는 ‘성에 안 차’를 발표하는 등 모순적인 행보를 보였다. 여성이 여성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여성들도 좋아하는 여성에 대한 이상한 고정관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설현처럼 아름다운 몸매와 얼굴을 뽐내는 여성 연예인의 기사 아래에는 아직도 어김없이 ‘여자들의 열폭’ 운운하는 댓글이 달리는 것처럼 말이다.
 
여성을 향한 여성의 호감을 지칭하는 단어가 생긴 것은 비교적 긍정적인 변화일 것이다. 그러나 걸크러쉬에 적합한 여성상과 그렇지 않은 여성상을 또다시 나누는 건, 여전히 세상이 여성들에게 쓸데없는 잣대를 거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일이 어째서 특이한 케이스로 비춰져야 하는지, 어째서 그 관계를 따로 지칭할 용어가 필요한 것인지, 왜 성적인 감정은 배제됐다고 말하는지 알 수 없다. 결국 걸크러쉬라는 단어가 오용되고 남용되는 데는 여성을 향한 편견과 동성애 혐오적인 시선이 모두 포함돼 있지만, 모두가 그것을 모르는 체하고 걸크러쉬라는 유행어에만 편승하기에 급급하다.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건 한때의 트렌드가 아니다. 또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수백, 수만 가지의 이유가 있으며, 걸크러쉬라는 단어 하나로 그 모든 관계와 감정을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굳이 걸크러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은 이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것뿐이다. 여성들의 사랑을 받는 정확한 공식 같은 건 없다. 여성을 무엇이라 규정하는 시도, 그것부터 포기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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