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인이 됩시다│① 새해엔 우리 모두 ‘문명’합시다

2016.01.05
지난해 12월 말, 온라인 게임 [문명 온라인]에선 현대 시대가 업데이트되었다. 헬기와 탱크 같은 현대적 탈것과 핵미사일 등의 무기, 그리고 로켓 제조 같은 과학 기술이 추가되었지만, 그것들만이 추가된 세계를 제목 그대로 현대적 ‘문명(Civilization)’이라 부르긴 어려울 것이다. 물론 전략 시뮬레이션인 이 게임에겐 잘못이 없다. 재밌는 건, 오직 문물만이 업데이트된 게임 속 세계가 지금 이곳의 풍경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그 12월 한 달 동안 한국에서는 여당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가 흑인 유학생의 피부색을 연탄과 비교했고,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소라넷 고발에 대해 “(만취 강간은) 여자 책임이 90% 이상”이라는 따위의 주장이 시청자 게시판에 달렸으며, 외교부는 피해자들과의 제대로 된 협의 과정 없이 일본 측과 위안부 과거사 협상을 타결했고, 사고 1년 8개월 만에 열린 세월호 청문회는 지상파 뉴스의 외면을 받았다. 21세기 문명사회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 2016년 새해를 맞는 한국의 풍경엔 여전히 많은 야만의 흔적이 존재한다.

계몽이라는, 케케묵어 보이는 기획을 희망의 새해를 위한 화두로 꺼내 드는 건 이 때문이다. 앞서의 사례들을 뭉뚱그려, 한국은 미개한 나라다, 라는 식의 과격하고 자기만족적인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각각의 사례들이 갖는 층위는 조금씩 다르다. 가령 위안부 협상 문제는 사회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잘못이다. 다만 과거사 문제는 “한·일 양국 관계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전기”(윤병세 외교부 장관)보단 피해자 동의가 최우선이라는 원칙이 어느 정도 강제력을 가질 만큼 사회적으로 공유되었다면, 이런 졸속 외교가 가능할 것이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연탄 발언은 김무성 개인의 부덕함 때문일 수 있지만, 유력한 여권 인사라도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면 정치 인생이 끝날 수 있다는 사회적 경험 혹은 합의가 있었다면 그런 일이 쉽게 벌어지진 못했을 것이다. 무식한 말로는 김무성을 능가하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 1위를 달리지만, 적어도 이에 대해 당 지도부는 대선 패배를 걱정하며 곤혹스러운 표정이라도 짓는다. 현대라는 말에 어울릴 만한 문명사회란 합리적이면서 윤리적으로도 건전한 명제들이 촘촘히 공유되고 이를 근거 삼아 진행되는 소통의 토대에서 건설된다. 이러한 기반 작업을 우리는 계몽이라 부른다.

이것은 2015년의 시대정신이라 해도 좋을 ‘헬조선’ 담론과는 궤를 조금 달리한다. ‘헬조선’에 대한 불만은 크게는 무너진 사회적 안전망과 구조적 모순에 대한 불신으로 요약된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사회를 권력과 화폐 같은 매체를 통해 조정이 이루어지는 ‘시스템’(보통 ‘체계’로 번역되지만 일반적인 맥락에선 ‘시스템’이란 표현이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과, 언어적 의사소통을 통해서 조정이 이루어지는 ‘생활세계’로 구분하는데, ‘헬조선’ 담론은 말하자면 시스템의 오류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바뀌기엔 요원하기에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생활세계 개선을 목표로 한 계몽이 중요한 건 이 지점이다. 광장에 모여 요구사항을 외치는 시민들을 차벽으로 가두고 물대포를 쏘는 건 비민주적인 권력이지만, 여기에는 사안을 성실하게 검토하는 대신 여기가 싫으면 북한으로 꺼지라고 말하는 또 다른 동료 시민들의 지지가 깔려 있다. 한국이 계몽이 필요한 사회인 건, 단순히 불의가 많아서가 아니라 이것이 왜 불의인지 설명하는 데 너무 많은 리소스가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몽을 통해 개개인들이 명확한 근거와 논증적 대화를 통해 상호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면 적어도 생활세계는 개선될 수 있다. 이것은 다시금 개개인의 ‘노오력’에 책임을 돌리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개인의 노력들이 모여 유의미한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 메커니즘을 복원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계몽이 필요하다는 것과 계몽이 가능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한국인의 문해력에 대한 비판이 잘못된 통계에 근거하고 있다는 의미 있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지난 한 해 동안 사회적 병리의 원인을 문해력에서 찾는 이들이 많았던 건 곱씹어볼 만한 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사례 중 소라넷 사건에 대한 상당수 남성들의 반응은 제대로 된 의사소통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 남성 4%가 소라넷을 보니 한국 남성들을 만나는 게 두렵다는 여성들에게 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냐고 반박하는 건, 강간모의와 몰래카메라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남성을 25명 중 1명꼴로 만난다는 것의 위험성을 외면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 논리적인 척하지만 조금도 논리적이지 않은 이런 해석과 발언이 쉽게 통용되는 한, 서로 합의 가능한 보편적인 준칙들을 세우는 건 요원하다. 그렇다면 실천적 차원에서 계몽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금 이 기사 같은 시도들이 작은 노력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미학자 진중권은 ‘어른이를 위한 포스트모던’이라는 탁월한 글에서 “대중의 정치적 지향성을 언어로 분절화하여 여론으로 제시하는”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 바 있는데, 기본적으로 생활세계가 아직 충분히 근대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이 역할은 지식인과 언론의 것이다. 이것은 자아도취가 아닌 사회적 분업의 문제다. 생업에 바쁜 이들을 대신해 성실하게 담론을 구성하고 역동적인 공론장을 여는 것. 하지만 세월호 청문회를 외면하는 지상파 방송과 광장에 나선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며 공권력의 엄혹한 대응을 주문하는 종합편성채널들의 모습처럼 현재는 이 역시 쉽지 않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고루해 보이는 계몽의 유효성과 언론의 책무를 다시 말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문명인이 되자고, 그렇게 제대로 된 문명사회에서 살아보자고. 그러니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그리고 그만큼 이성의 세례도 많이 받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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