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뭐라고]·[죽는 게 뭐라고], 늙는 게 뭐라고

2015.12.30
청춘이라는 건 참 짧구나. 생각하게 된 것은 청춘이 지나가고 나서도 한참 지난 뒤의 일이다. 평균 수명 80대 시대에, 그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성장은 끝났고 남은 건 노화다. 툭하면 고유명사를 잊어버리거나 크고 작은 수술을 받는 등 친구들과의 괜한 공통점도 늘어가지만, 식빵을 사 왔더니 어제 샀던 식빵 한 봉지가 뜯지도 않은 채 냉동실에 들어 있는 걸 발견할 때면 유독 나만 심각한 건 아닐까 더럭 겁이 나기도 한다. 성숙한 어른은 미처 되지도 못했는데 몸은 벌써 늙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부터, 노인이 된 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인생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은 이제부터 쌓여갈 텐데 그다음까지 걱정해야 한다니, 사는 건 끊임없이 피곤한 일이라고 한탄하던 중 사노 요코를 만났다. 1938년 태어난 그는 일본의 패전 이후 병과 영양실조로 어린 남동생들과 오빠를 잃었다. 그러다 보니 두려움을 모르고 오로지 ‘분할 때만 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그는 자신의 대표작 [백만 번 산 고양이]의 주인공 고양이처럼 퉁명스럽고 제멋대로인 성격이었다. 암 수술을 받은 다음 날부터 굴뚝처럼 담배를 피우고, 수명이 2년 남았다는 말에 충동적으로 잉글리시 그린 컬러의 재규어를 사버리는 사람. [사는 게 뭐라고]와 [죽는 게 뭐라고]는 이 박력 있게 괴팍한 할머니가 말년에 쓴 에세이집이다.

아침에 일어나 뭔가를 만들어 먹고 쓰레기를 정리하고 장을 보고 돌아와 TV를 본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늘어놓던 사노 요코는 글의 말미에 “이 글은 노망난 늙은이의 보고서로 참조해주십시오”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어떻게 아침밥을 먹을지 스스로 모색해나가야” 하는 삶의 기록은 지독히도 솔직하다. 늙었다고 해서 세상이 돌봐주는 건 아니다. 하루 세 끼, 아니면 두 끼라도 밥을 챙겨 먹어야 한다. 굼뜨게 은행 업무를 보다 젊은이의 눈총을 받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다. 죽는 날까지 돈 걱정은 떠나지 않고,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사노 요코는 바늘 1,000개를 다발로 만들어서 찌르는 것 같은 두통이며, 갈비뼈를 쪼개는 듯한 고통 때문에 자살하고 싶어져 기둥에 몸을 동여맸던 이야기를 실컷 한 끝에 “나는 허세가 있는 사람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시치미를 뗀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은 암 수술 후 [겨울연가]에 푹 빠지는 바람에 한국 드라마를 게걸스레 섭렵한 이야기다. 개연성 없는 스토리를 신랄하게 비평하면서도 “집에 항상 욘사마가 있다는 안도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고 고백한 그는 한 발 물러서 자신의 한심함을 들여다보다가도 이 거부할 수 없는 행복감의 근원을 분석한다. 결국 1년간 자리보전하고 TV만 보다 턱이 틀어진 끝에야 한류 사랑은 막을 내린다. 바보 같은 짓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득 용기가 비집고 나온다. 인간은 몇 살을 먹어도 쓸데없는 짓을 할 수 있고, 그래도 괜찮다는 것.

그러니까,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현명해지거나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는 건 아니다. [인턴]의 벤(로버트 드 니로)처럼 점잖고 마음 넓은 어른이 되고 싶어도, 모범적인 노인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세계는 점점 이해하기 힘들어지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먼저 떠나며, 평생 지켜왔던 신념을 슬쩍 뒤집을 만큼 약해지는데, 젊었을 때도 못 한 걸 어떻게 하겠나. 실수한 공무원에게 마구 화를 내고 가까운 이들에게 가시 돋친 말을 내뱉은 뒤 자기혐오에 빠진 사노 요코는 말한다. “나는 나와 가장 먼저 절교하고 싶다.” 60년 넘게 산 사람에게도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훌륭하게 죽자”고 결심했다가, 다음 순간 “훌륭한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후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이기적이고 덜된 나를 마지막까지 돌봐야 하는 것도 나다. 사노 요코는 그렇게 혼자인 자신을 직시하며 글로 옮겼다.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심술궂은 생명력을 가득 담아서.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2035년에는 전체 노인 4.3명 중 1명, 약 343만여 명이 독거노인이 될 거라고 한다. 혼자 노년을 보내고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이들의 수가 지금의 2.5배로 늘어난다는 얘기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냄비를 까맣게 잊던 엄마에게 핀잔했던 걸 후회하면서, 끼니마다 당뇨와 암을 향해 한 발씩 다가가면서 나 역시 늙어가고 있다. 하지만 한 살 더 먹을 날이 벼락같이 닥쳤음에도 어쩐지 조금 덜 두려워졌다. “달력에 엑스 표를 치면서 공소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절도범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해방될 날”을 기다리던 사노 요코는 2010년 겨울 세상을 떠났다. “정말로 기운차게 죽고 싶다”고 말했던 그는 정말로 죽음을 향해 기운차게 나아가며 남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남겼다. [죽는 게 뭐라고]의 원제는 [죽을 의욕 가득]이다. 죽으려면 아직은, 아마도 멀었다. 그러나 덕분에 늙어갈 의욕이 조금 더 생겼다. 가득, 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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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놀면 뭐하니?' 효리X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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