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혜 연출가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권태예요”

2015.11.11
양손프로젝트(이하 양손)가 선택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무겁다. 군사 독재 시절 납치당해 고문을 받은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복수를 꿈꿨고([죽음과 소녀]), 떨칠 수 없는 가난 때문에 여자들은 또 이용당했다([여직공]). 거리의 여자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낯선 남자의 집에서 아이를 낳고([모파상 단편선-낮과 밤의 콩트]), 공판을 기다리며 감방을 뛰어다닌 남자([김동인 단편선])도 있었다. 오는 13일부터 공연되는 [폭스파인더] 역시 정부가 파견한 조사원이 한 마을에 불러온 불행을 쫓는다. 뚜렷한 답을 내리기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인물에 대한 그 어떤 판단도 유보한다. 극장에 있는 모두가 상상으로 인물의 상황과 감정을 공유하길 원하는 이들의 작업방식은 불친절하기도 하다. 그런데, 양손의 공연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걸까. 치졸한 나와 변화하는 나를 인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양손의 박지혜 연출가를 만나 물었다.

[폭스파인더]는 관객에게 생소한 희곡인데요. 어떻게 선택하게 되셨나요?
박지혜
: 양손이랑 어울릴 것 같다고 추천받은 작품인데,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저희도 별로 없어요. 작가 이름이 ‘Dawn King’이라 우리끼리는 그냥 왕새벽 언니라고 불러요. (웃음) 사실 저희는 네 명 모두가 뜨겁게 할 수 있을 때 시작하는 편이라 작품을 고르는 게 어려워요. 시간도 많이 걸리고요. 이 작품도 처음 읽었을 때는 호불호가 갈렸고, 이후엔 네 명의 욕망이 다 달랐는데도 이거 하나는 명확했어요. ‘이야기는 심플하다. 하지만 그 안에 많은 기호가 있고, 그걸 풀어내는 게 우리에게는 재밌는 창작과정이 될 것 같다.’ 맨날 빈 의자 보면서 연기하던 배우들에게는 ‘이제는 마주 보고 연기하고 싶다!’는 욕망도 있었던 것 같고요. 

마주 보고 연기해보니 어떻대요?
박지혜
: 행복해해요. 다양한 연기가 있지만, 그들이 처음 연기를 배웠을 때는 주로 마주 보는 연기를 했을 거고, 우리가 가장 많이 보는 연기도 두 명이 직접 컨택하는 연기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오랫동안 그걸 거의 안 했더라고요. 양손은 서사극적 문법에 대한 탐구를 오랫동안 해왔고, 저 개인적으로도 그런 걸 훨씬 좋아해요. 하지만 배우들에게는 사실주의에 기반을 둔 연기에 대한 갈증이 있을 거고, 어떤 인물을 이해하고 체화시키는 훈련에 있어서는 이런 연기가 더 좋은 것 같아요. 그 감각을 잃지 않고 서사극을 해야 하는 것도 맞고요. 물론 이것도 너무 너무 힘들다! 하는 부분도 있지만 한 인물이 되어서 상대방과 이 순간을 사는 일에 대한 경험을 굉장히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것 같아요.

작품의 키워드로 ‘믿음’을 꼽았던데, 너무 큰 개념이라 오히려 모호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박지혜
: ‘믿음’이라는 말은 되게 크고 와 닿지 않죠. 이 작품에서 악으로 설정된 여우라는 존재도 그래요. 우리는 여우가 악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설정이 와 닿지 않아요. 하지만 작품 속 인물들에게는 그 이야기를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겪고 있을 거예요. 이걸 잘 들여다보면 우리에게도 비슷한 것이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내가 무엇을 믿고 있고 그걸 왜 믿게 됐는지, 믿음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왜 그렇게 바뀌고 그 변화가 얼마만큼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지.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요?
박지혜
: 약간 웃긴 얘긴데, 선풍기 틀고 자면 죽는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웃음) 그게 과학적으로 아니라는 얘기가 있고, 사람들도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그럼 너 선풍기 틀고 잘 수 있어?”라고 묻는데 못 하겠더라고요. 이건 왜 그렇지?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이야기가 메르스로까지 확장됐어요. 얘기를 하면 할수록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고. 물론 결론은 ‘우리는 선풍기를 틀고 잘 수 없다’로 났지만. (웃음)

굉장히 작은 이야기에서 시작해 큰 이슈로까지 번졌네요.
박지혜
: 사건 자체나 대상의 크기에 집중하기보다는 그걸 받아들이는 인물의 구체적인 변화와 작은 갈등을 계속 가시화시키고 거기에 집중하려 하고 있어요. 워낙 넷 모두가 자기 내면, 각자의 욕망에 천착하는 편이에요.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어떤 것을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고, 그것에 대한 관심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더 관심 있는 건 결국엔 한 인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거든요. 며칠 전에 그런 얘기를 했어요. [폭스파인더]를 보는 것과 이런 비슷한 실제 사건을 다룬 기사를 보는 게 어떤 차이가 있나.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감정을 같이 겪길 원하고 그 순간을 공유하길 원해요. 확실히 안에서부터 출발하길 원해요. 그 말은 곧 이 내면이 해결되면 어떤 것도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다루는 감정들이 어떤 면에서는 다소 무겁고 부정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박지혜
: 똑같은 일을 겪었을 때 소화가 되는 사람이 있고, 거기에 너무 집중하는 사람도 있고, 튕겨내는 사람도 있어요. 사람마다 다 다른데 저는 어릴 때부터 왜 사람은 힘들지? 왜 아프지? 왜 울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있었어요. 옛날에 누굴 싫어했던 적이 있어요. 걔가 너무 싫으니까 안에서 뭐가 막 생기는 게 신기한 거예요. 물론 걔가 나에게 한 잘못이 있었지만, 그 속을 막 들여다보니 사실은 내 문제였던 거죠.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어떻게 보이고 싶고, 저 아이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내가 갖고 싶지 않고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어요. 사람들 내면에는 치사하고 유치하고 치졸한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이걸 부정적이라고도 볼 수 있죠. 하지만 그걸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인간은 부정적인 동물, 이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면 사실 그냥 모두 다 그렇거든요. 그런 감정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느냐를 잘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안에서 부글대는 감정을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박지혜
: 그냥 저는 저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난 어떻게 생겨난 인간이고 어떻게 느끼는가. 항상 굉장히 헤매고 있어요. 그래서 중·고등학생 때는 철학을 공부하는 게 꿈이었어요. 나는 무엇인가 이런 거 있잖아요. 진창에 빠지는 거, 참된 자아와 만나는 일. (웃음) 그런데 이것들이 연극을 하면서 충족이 되는 것 같아요. 나에 대한 얘기를 누군가와 할 수 있고, 그걸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고, 또 그걸 보는 사람이 있고.

양손의 작품들은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잡히는 명확한 것 보다는, 배우와 관객이 어떤 정서를 공유하며 상상으로 빈 공간을 채워가잖아요. 왜 그런 작업방식을 택했나 생각했는데 서사가 아닌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기 때문인가 봐요.
박지혜
: 이걸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 믿을 수 있을까 해서 그런 것들이 생겨난 것 같아요. 만드는 사람이 강렬한 체험을 하고 싶어서. [죽음과 소녀] 할 때도, 피도 안 흘리는데 의자에 묶어놨다고 해서 그걸 고문받는 거라고 믿을 수 있는가, 오히려 더 못 믿겠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작업은 배우가 조명 큐를 만들고, 배우가 무대의 무언가를 만들어내요. 굳이 소품이나 세트, 조명 등으로 설명하는 게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비우는 거거든요. 대신 그 빈 곳을 어떤 감각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거죠.

배우에게 굉장히 가혹한 방식인데, 연출님에게 배우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인가요.
박지혜
: 저는 작품을 만들 때 같이하는 사람들, 특히 무대에 서는 퍼포머들이 나와 함께 있을 때 가장 빛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누구에게나 많은 매력과 생각, 고민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가장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메신저. 그러면 좋은 연출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의미에서 양손은 특별한 집단이에요. 제가 밖에서 많은 작업을 해본 건 아니지만, 배우가 하고 싶은 게 뭔지를 연출가가 꺼내줘야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 배우들은 각자가 자신의 창의를 발현하도록 훈련되어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작가적이기도 하고, 연출적이기도 하고, 미술적이기도 하죠. 개인이 모두 각자의 창작자이기 때문에 저는 진짜로 행운이고 너무 너무 편해요.

그렇다면 공동창작의 방식 안에서 연출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박지혜
: 개인의 욕망이 다르고, 거기에 저까지 파닥대기 시작하면 난리가 나요. (웃음) 시간이 좀 지나면 저는 이걸 모아서 정리하거나 제시해야 하는 단계가 와요. 그러려면 그들의 욕망을 잘 들여다봐주는 게 중요해요. 제 직업을 ‘연출가’라고 생각한 게 사실 얼마 안 돼요. 그냥 전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고 같이 만드는 사람 중 한 명이지만, 타이틀이 없기 때문에 ‘연출가’라 불리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올해 초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도 그냥 양손의 작업을 응원해준다는 의미로 받았어요. 그래서 나머지 셋이 “오~ 신인연출가” 이러면서 놀려요. 수상은 그냥 저희 팀의 놀림거리가 됐죠. (웃음)

지난번 이자람 씨와 인터뷰를 하면서 연출님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했어요. 그중 “모든 것을 새로 본 양 봐준다”는 얘기가 인상적이었거든요.
박지혜
: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권태예요. 새롭게 보는 것도 있지만, 새롭게 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나는 모른다, 아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양손 작업에 대해서도 네 생각 어차피 다 알고 있어, 이런 게 너무 너무 싫거든요. 그러면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이 사람은 뭐가 달라졌지? 내가 못 본 건 뭐였지? 를 계속 보려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 사람은 모두 변화하니까요. 보는 게 좋고, 들어주는 게 좋고, 반복적으로 계속 봐도 재밌어요. (웃음) 연출이 왜 적성에 잘 맞는가를 생각해보면 똑같은 장면 100번을 봐도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거든요. 그래서 자람 언니가 되게 신기해했었죠.

여러 차례의 진로 변경 중 [고도를 기다리며]가 연극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작품이었다고 들었어요.
박지혜
: 인생의 쇼크. 울었어요. 너무 좋아서. 그냥 말인데, 그 글들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려고 서울교대를 다녔는데, 졸업하기 전 이걸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방황을 했거든요. 저도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뭔가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그 무언가가 나에게 오지 않을까. 행간의 의미까지 다 알겠더라고요. (웃음) 사무엘 베케트는 내면에 있는 어떤 비참함을 잘 보는 사람인데, 그의 작품에는 그 비참함을 탁 안아주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저도 엄청 위로를 받았고, 실제 내 눈으로 이걸 보고 싶고 감각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던 것 같아요.

만약에 그 [고도를 기다리며]의 연출을 맡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웃음)
박지혜
: 너무 해보고 싶지만, 첫사랑 다시 보기 두려운 그런 느낌이 있어요. 이걸 해서 망쳐버리면 어떻게 하지? 나의 이 아름다운 작품을? 근데 꼭 해보고 싶어요.

작년부터는 이자람 씨와 판소리를, 여신동 무대미술가가 연출하는 [비행소년 KW4839]에도 드라마트루그로 참여하는 등 양손을 벗어난 작업들을 하고 있는데요. 앞으로 어떤 작업을 더 해보고 싶나요.
박지혜
: 저는 제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무섭거든요. 내가 변하고 있는데 그걸 못 보는 것도 무섭고요. 그런 변화를 계속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나를 진짜 변화시킬 수 있는 작업, 내가 자극을 느끼는 작업. 모든 창작자들의 꿈이죠.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있어요. 계속 창작자 육성,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고. 고정되거나 궤도에 올라서 인정받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요. 맘껏 헤맬 수 있고 맘껏 바뀔 수 있는 그런 작업을 계속 하고 싶고, 그래서 지루하거나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글. 장경진
사진. 이진혁(KoiWorks)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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