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어른 되기 힘들어도 꼰대는 되지 말자는 다짐

2015.10.14

* 영화 [인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회사는 바다 같은 곳이야. 표면은 잔잔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는 각자가 복잡한 일들을 끌어안고서 출렁이고 있거든.” 영화 [인턴]을 보며 오래 전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회 공헌 프로그램인 시니어 인턴으로 뽑혀 인터넷 패션 쇼핑몰 ‘어바웃 더 핏’에 입사한 일흔 살의 벤 휘태커(로버트 드 니로)는 이 바다 속에서 벌어지는 해류의 움직임이며 직장 생태계의 질서를 헤아릴 줄 안다. 그리고 멀미하기 직전인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들이 울렁증을 멈추도록 조용히 조치를 취한다. 잡동사니를 쌓아둔 책상이 너무 신경 쓰이거나, 다른 직원과 연애가 잘 안 풀려 골치가 아프거나, 하는 일에 비해 상사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느껴 좌절하던 회사의 어린 동료들은 그의 도움으로 문제에서 벗어난다. 스스로의 선한 규율을 지키고 근면하게 행동하며, 모두에게 적절한 조언을 주는데 누구와도 적이 되지 않는 조직구성원이라니, 도대체 가능한가? 차라리 [해리 포터] 시리즈의 집 요정 도비가 훨씬 현실적인 조력자로 느껴질 만큼 벤은 사무실의 요정처럼 반짝이는 인물이다.

“나는 이 회사의 공식 키다리 아저씨인 거야?” 스스로 내뱉는 대사처럼 벤의 위상이 요약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회사에 꼭 필요하진 않은 잉여의 인력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던 그는 생계를 위해 치열하게 일할 필요도, 젊은 인턴들처럼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절실함도, 리더로서 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부담도 없다. 영화는 그에게 한 발 떨어져 우아하게 관찰하고 친절을 베푸는 위치를 주었다. 스타트업을 단기간에 키워낸 젊은 대표이자 일하는 엄마로서 사업과 가족 사이에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줄스 오스틴(앤 해서웨이)을 둘러싼 문제들이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반면, 벤의 세계는 납작하게 말끔하다. 젊은 동료가 이베이에서 따라 사게 만드는 빈티지 서류가방처럼 단정하게 낡았고, 낡았지만 쿨해서 호감을 끄는 것이다. [인턴]의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삶의 무게와 갈등의 중심을 젊은 여성 줄스 쪽에 놓는 대신, 벤의 캐릭터에는 어떤 신데렐라 로맨스의 남자주인공보다 더 근사한 스타일들을 부여하고 실컷 이상적인 신사의 면모를 발휘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울 만큼 멋있는 어른을 만들어 놓고서 그 말과 행동을 즐기게 만든, 일종의 ‘어른 판타지’ 장르물이다. 


존재하지 않는 사무실 요정 내지는 상상의 동물 유니콘을 관찰하는 기분으로 벤을 봤다. 단정하고 유머 감각이 있고 친화력이 넘치지만 무엇보다 그의 미덕은 뭘 해야 할지보다 하지 말아야 할지를 안다는 것이다. 줄스의 기사가 술을 마시는 걸 목격하자 안전을 위해 대신 운전석에 앉지만, 그를 불필요하게 공격하거나 깎아 내리지 않는다. 줄스의 남편 매튜의 외도에 대해 알게 되고서도 끙끙대며 고심하되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들을 줄 알아서 도움이 되는데, 40년의 전 직장 생활에서 쌓은 경험이 충분히 두터울 텐데도 ‘내가 해봐서 아는데’ 하며 가르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고민스러운 상황은 답이 안 보여 누군가의 엄청난 혜안을 빌려야 할 때가 아니라, 이미 내가 갖고 있는 답에 확신이 부족해서일 때가 많다. 벤은 그럴 때 충분히 들어주고, 따뜻한 치킨 수프를 사다 주고, 눈물을 흘리면 깨끗한 손수건을 빌려준다.

나이를 떠나 교감할 수 있는 평등한 관계가 그래서 가능하다. 벤의 대사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새로운 전문경영인을 찾아 회사를 넘기려는 줄스를 설득하는 대목인데 대략 이런 요지였다. ‘너만큼 이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네가 이룬 성취는 대단한 거다, 그 엄청난 걸 고작 바람피운 남편을 되돌리겠다고 포기하지 마라.’ 벤은 줄스에게 네가 아직 젊어서, 혹은 다들 그렇게 어렵게 사니까 아프고 힘든 게 당연하니 참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너는 노력하고 잘해왔으니 더 큰 행복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그걸 당당하게 누리라고 얘기한다. 지금 여기의 어른들에게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혜나 연륜은 나이를 먹는 대가로 당연히 얻는 가치가 아니라는 걸 여전히 미숙하고 배려 없는 어른들을 도처에서 보며 느낀다. 영화 속에서도 줄스의 엄마는 매번 사랑한다고 인사하는 딸에게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할 줄을 모르니까. 심지어 벤과 같은 나이인 일흔 살의 가수 조영남이 방송에서 걸 그룹 마마무에게 “팀 이름이 엄마가 없다는 뜻이냐?”는 농담을 하는 걸 봤다. 재미도 없고 예의도 없었다. 이상한 어른들을 그저 비난할 수 있을 때는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진짜 무서운 건, 어른의 위치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을 때 자신이 욕하던 그런 모습을 닮아있을 가능성이다. 벤과 같은 어른으로 아름답게 늙고 싶다는 꿈을 성취하는 일은 판타지를 현실로 만드는 만큼의 노력이 들 것이다. 다만 좋은 어른의 인격이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 아득하기도 다행스럽기도 하다. 매너가 사람을 만들고 좋은 사람이, 결국 좋은 어른이 될 것이다.

글. 황선우([W Korea]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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