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진 “[만추]가 쓸쓸하지만은 않아서 다행이에요”

2015.10.14
낮은 목소리, 적은 말수, 미묘한 표정. 김소진은 주로 감정을 안으로 삭이거나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에 선다. 테러의 한복판에서 “윤영화 앵커도 무사히 뉴스 마치시길 바랍니다”라 말하던 이지수 기자(영화 [더 테러 라이브])도, 지진과 방사능 노출이라는 상황에서도 침묵하던 유우(연극 [배수의 고도])도, 자신보다 남편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떠나던 실비아(연극 [프라이드])도 그랬다. 그들의 침묵이, 이후의 고뇌가 관객의 마음에 닿았다면, 냉정과 혼돈의 복잡미묘한 감정의 레이어를 말 대신 눈빛으로 투영해낸 김소진 덕이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연극 [만추] 속 애나의 대사 “꼭 말로 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는 김소진을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침묵과 여백을 오가며 많은 것을 눈으로 말했고, 그 이야기는 눈물이 되어 흐르기도 했다. 침묵의 공기를 온전히 담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영화 [만추] 개봉이 벌써 5년 전이더라구요. 영화를 봤던 2010년과 애나가 되어 연기를 하는 2015년, 다른 느낌이 있던가요?
김소진
: 일단 영화는 탕웨이라는 배우 (웃음) 너무 예쁘고 매력 있었죠. 그 여자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많이 아팠겠구나 싶어서 되게 보듬어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야기의 배경이나 여자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그게 싫지 않더라고요. 영화와 연극이 많이 다르진 않아요. 다만 배우가 다르다는 건, 복잡한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이 다르게 올 수 있다는 거거든요. 그건 같이 하는 (김)지현이도 같아요. 나는 이 순간에 마음이 열렸다면 지현이는 이 지점이 아니라 조금 더 멀리 다른 지점에서 열리는 것 같은 거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열린다는 건 똑같아요. 나를 더 자극하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영화에서는 이 순간에 이런 감정이 있었고 나도 그게 동의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내가 작업을 해보니 그 감정이 아닌 것 같아서 그럼 그건 영화처럼 해야 되는 걸까? 내 감정이 맞는 건가? 하는 지점들이 있어요. 확신 없는 부분이 좀 있죠. 그 갭을 좁히는 걸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그 혼돈에 대해서 연출가는 어떤 디렉션을 줬나요?
김소진
: 아무래도 이 작품은 애나라는 인물의 정서를 주로 따라가잖아요. 그래서 그 여자의 감정의 흐름들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눴던 것 같아요. 영화는 클로즈업도 있고 남들이 못 보는 시선도 딸 수 있지만, 연극은 공간이 그냥 펼쳐져 있고 관객과의 거리도 분명히 있으니 심리적인 부분을 어떻게 더 표현해 관객과 닿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해주시는 것 같아요. 본인의 생각도 있겠지만 저도 그렇고 지현이도 그렇고 배우들이 인물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를 열어두고 지켜봐주고 있어요. 근데 감정이 굉장히 미묘해서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고. (웃음)

[만추]는 뚜렷한 서사가 중심이 아니라 감정의 결을 느끼는 작품이라 배우가 해야 될 지점이 더 많을 것 같아요.
김소진
: 이게 차라리 사랑하는 사이, 싫어하는 사이 이렇게 분명한 감정이라면 좀 더 명확할 수 있겠죠. 그런데 [만추]는 대사도 많지 않고, 침묵과 포즈(pause) 속에 많은 감정을 갖고 있는 거라서 그런 것들이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이 될지 궁금하기도 해요. 때때로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 침묵과 여백을 충분히 즐기지 못할 수가 있거든요. 가만히 있으면 관객들은 뭔가를 계속 보려고 할 테니까요. 연출님도 그랬고, 우리 모두 이 정적과 침묵을 충분히 쓰고 즐겨보자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포즈의 의미를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와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는데, 사실 뭐 이것도 우리가 순간순간들에 좀 더 확신을 가져야겠죠. 영화의 편집점을 지금 배우가 해야 되는 거라 제가 확신했던 부분들에 관객도 같이 동의가 될지에 대한 그런 설렘이 있어요.

영화에서는 상황을 짐작해 상상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연극에서는 조금 다른가요?
김소진
: 영화 이상으로 많은 걸 하지는 않지만, 왕징 부분이 조금 달라요. 옛 기억이라는 면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어떤 회상들을 심어주는 부분이 있죠. 굉장히 짧은 순간이지만 그래도 저 여자가 그런 시간들을 겪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이 여자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서 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그림? 영화에서는 훈도 애나의 서포트 정도로만 그려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연극에서는 훈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순간을 찾아보려고 하고 있어요. 근데 결과적으로는 애나가 또… 다 가져가기 때문에. (웃음)

말씀하신 대로 애나의 정서가 주가 되는 작품인데,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
김소진
: 겉으로 봤을 때는 뭔가 되게 차분해서 평온해 보이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복잡한 감정을 가진 불안한 상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혼생활도 그다지 좋지 않았을 거고, 그 20대의 젊은 여자가 7년이라는 세월 동안 혼자 얼마나 춥고 외로웠을 거야. 많지 않은 표정과 침묵은 그 시간을 살아온 역사에서 묻어 나온 결과겠죠. 그 무게감이 어느 정도일까. 애나는 모든 상황을 적극적으로 취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랬다면 판결 자체가 다르게 났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거잖아요. 그렇다고 그게 온전히 받아들인 걸까. 여러 가지에서 침묵을 지킨 것 같은데 글쎄. 그런 시간 속에 있었기 때문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사람이 참고 어떤 감정을 계속 쌓아두고 쌓아두고 또 쌓아두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내 감정이 뭔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 헤집으면서 찾아야 되는 상황이 돼요.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거예요. 잘 모르고 서툴죠. 저도 표현을 잘 못 해요. 표현에 서툴고 사랑에도 좀 서툴고. 대사에도 나오거든요. “꼭 말로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그래서인지 주로 감정을 안으로 삭이거나 들어주는 인물에게서 김소진이라는 배우의 매력이 도드라졌나봐요.
김소진
: 평소에도 들어주는 편인 것 같긴 해요. 누구나 자기 속을 다 드러내놓고 살지는 않지만, 역할들이 정말 그랬던 것 같아요. 뭔가 있거나 있어 보이는 사람. 사실 저 그렇지 않은데. 아무것도 없어요. (웃음)

그런데 올해 뮤지컬 [달빛요정과 소녀](이하 [달빛요정]), 연극 [러브]에서는 좀 더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식이었죠. [러브]는 동성애나 성매매 같은 설정도 제법 셌고요.
김소진
: 올해는 저 개인적으로도 고민이 좀 있었고 다른 선택들을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내가 지금까지 내 만족을 위해서 작품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그게 이기적인 선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중첩돼서 들고. 그래서 똑같은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아볼 수 있는 작품이 [달빛요정]이었어요.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우선순위고 그것이 곧 내 삶인 사람. 그래서 내가 망가지든 진지하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온 정신과 온몸을 다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거죠. [달빛요정]도 뮤지컬이라서 그랬지, 거기서도 이야기 들어주는 역할이었고 표현이 달랐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러브]도 처음 읽고 나서는 솔직히 “뭐야?” 이랬어요. 그런데 다시 읽었을 때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뭔가 익숙한 게 지루해졌었나요?
김소진
: 지루한 건 아니었고, 익숙하다고 얘기하는 것도 사실 뭐 그렇게까지 익숙한 것도 아니었어요. 근데 그냥 문득 자신감도 없어지고 확신도 없고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에 대한 것도 불분명해졌어요. 누구나 다 이런 생각들 갖지만 살아야 되니까 살고 있는 건데 나이도 들고 하니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나 봐요. (웃음)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면 그 마음으로 또 몇 년 그렇게 부딪히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변화를 겪고 나면 다시 돌아갔을 때 익숙한 것들 안에서 새로운 걸 발견할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한 인터뷰에서 “동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사는 배우가 되고 싶다”([연극인])고도 했고, 그동안 했던 작품들이 그 고민을 잘 대변해줬다고도 생각했는데요.
김소진
: 맞아요. 그동안 만났던 작품들, 인물 하나하나 고민도 정말 많이 해서 열심히 했고, 후회도 없거든요. 그런데 반복된 선택은 저에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았어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배우로서도 저 스스로도 어떤 선택을 해야 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쉬운 것들도 있겠죠. 어떤 작품을 같이 하자고 했을 때, 작품도 좋은 것 같고 내 몫을 열심히 하고 같이 하는 사람들하고도 다 아는 사이니까 즐겁게 재밌게 할 수 있겠다. 근데 그건 해봤잖아요. 그런 거 말고 내가 좀 힘들 것 같아도, 하고 싶은 역할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이 무언가를 이야기할 만한 분명한 가치가 있다고 하면 내가 그런 것들에 부딪혀보면 변화하지 않을까. 그런데, 참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변화가 무슨 필요냐.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사람은 다 이기적인 거야!’라는 생각도 드는데 (웃음)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여전히 동시대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고민은 유효한가요.
김소진
: 그 말은 ‘지금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동료들, 당신이 하는 고민을 나도 하고 있다’ 정도 같아요. 네가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면 너 혼자가 아니고 나도 바라보고 있다 그런 것. 근데 어쨌건 어려워요. 어렵고 연극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 마음들이 같이하는 사람들 모두가 맞아져야 하는 거니까요. 그래도 잠시 내가 생각을 놓쳤을 때 그런 부분을 일깨워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그게 차이무 선배님들인 것 같아요.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고, 내가 옆에 있을 수 있고, 제 얘기도 들어주시고. 이번에 20주년 맞아서 이상우 선생님 작품을 하는데 선생님이 많은 고민을 하셨구나,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또 한 번 일깨워주시는구나 싶어요. 그런 분들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하죠. [만추]도 쓸쓸하지만은 않아서 다행이에요. 과정이 쓸쓸할 수 있고, 결국엔 ‘이건 사랑이야’라고까지는 말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마음들을 열게 되고 새로운 것들을 바라보게 되니까요.

글. 장경진
사진. 이진혁(KoiWorks)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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