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전쟁의 역설], 소개만으로도 위험한 책

2015.09.25


역사학자 이언 모리스가 쓴 책 [전쟁의 역설]은 어떻게 쓰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구역질 나는 반동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니 차라리 곧장 핵심으로 질러가자. 모리스는 “전쟁이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라고 쓴다. 독자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발칙한 주장이 이어진다. 전쟁 덕에 인류는 여기까지 발전했고, 더 풍요로워졌고, 결국 폭력이 줄어들었다. 전쟁은, 희생당한 이들이 동의할 리 없지만, 세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었다. 소개만으로도 이리 위험한 책이라니, 역시 고르지 말았어야 했어.

오늘날 선진국 시민은 거의 체감하지 못하지만, ‘안전’은 인류사에서 번번이 생산에 실패했던 핵심 공공재다. 안전이 공급되어야만 우리는 화폐를 쓰고 시장거래를 하고 부를 축적하고 동료 시민을 믿고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다. 안전은 누가 공급하나? 무력과 사법권을 독점한 기구, 그러니까 국가다. 국가는 어떻게 태어나나? 전쟁이다. 무력행사를 더 잘, 더 대규모로 하려던 인류가 찾아낸 해법은 전문 전쟁 수행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모병, 훈련, 병참, 조세… 국가는 무엇보다도 우선 전쟁 수행 기구로 태어났다.

모든 전쟁이 국가를 탄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유목민의 전략은 단기 약탈이다. 스쳐간 곳이 폐허가 되든 말든 한 번 공격으로 뽕을 뽑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농경 세계에서 지배층은 장기 수익률을 따져본다. 농부를 살려두면, 더 오래 뽑아 먹을 수 있다. 이제 지배층은 알량하게나마 ‘피지배자 보호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자 수익률이 올라갔고, 따라서 전쟁 능력도 강해졌다. 일단 등장한 선순환 모델은 널리 복제됐다.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안전을 시작으로 여러 공공재를 공급하면서, 결국 세상은 더 나아졌다.

이 아이디어는 17세기 철학자 토마스 홉스까지 이어지는 뿌리 깊은 지적 전통을 잇는다. 핵심 질문은 공공재 공급의 딜레마다. 자연상태에서 언제 내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를,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제 무임승차를 할지 모를 상대와는 협력이 성립하지 않는다. 공공재를 생산하려면 배신과 무임승차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국가는 최종 심판의 자격으로 이 역할을 한다. 국가란, 우리가 ‘전쟁 덕분에’ 찾아낸 공공재 공급 딜레마의 해결책이다. 자, 일단 인류는 여기까지 진도를 뺐다. 다음은? 9월의 도쿄를 보며 떠오르는 질문이다.

아베 내각이 추진한 안보 관련법이 9월 19일 참의원(상원)을 통과했다. 일본은 평화 헌법으로 불리는 헌법 9조에서 전쟁을 영구히 포기했지만, 안보 법안은 자위대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했다. 사실상 헌법을 우회해 전쟁 기능이 부활했다. 우리의 용어로 바꾸면, 아베는 다음 단계의 공공재인 국제 안전 공급에 참여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역사의 악연으로 얽힌 동아시아의 눈으로 보면 황당한 주장이지만, 지금껏 이걸 혼자 맡아왔다고 불만인 미국이 적극 환영한다. 간단치 않다.

그런가 하면 의회는 일본 역사에 손꼽힐 반대 시위 인파로 포위됐다. 헌법 9조는 지구촌 동료 국가들의 호혜 협력에 안보를 맡기겠다는 선언이었다. 무력을 독점한 최종 심판이 아니라 상호 협력 네트워크가 공공재를 공급한다는 모델은 인류사에 없던 시도다. 비록 당장은 헐거울지라도(이 모델이 실제로 작동했던 것 같지는 않다) 포기하기엔 아까운 실험이다. 어느 쪽을 지지하든 이 책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전쟁의 역설과 공공재 공급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것은 논리를 훨씬 풍부하게, 적어도 유력한 반론에 더 잘 대비하게 해준다.

천관율
[시사IN] 기자. 6년 동안 정치 기사를 썼다. 2014년 11월부터 사회 기사를 쓴다. 농땡이를 보다 못한 조직이 발로 뛰는 부서로 보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정확하다.

디자인. 전유림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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