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요새 꿈이 더 커진 것 같아요”

2015.09.23
희곡은 누군가에 의해 발화(發話)되었을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 캐릭터와 배우가 같은 상황과 고민 안에 있다면, 그 힘은 더욱 막강해진다. 천재 테크니션으로 불리던 미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스티븐이 돌연 활동을 멈추고 오스트리아로 향한다. 자신의 기준 안에서만 움직여오던 이에게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새로운 과제가 떨어지고, 반강제적으로 시작했던 일은 그의 모든 것을 바꾸고 성장시킨다. 2007년 데뷔 후 성실하게 열일곱 작품을 해왔던 이창용은 돌연 관객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른한 살, 보통의 이창용으로 살았던 1년 3개월의 경험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고, 그 결과가 [올드위키드송] 무대로 펼쳐졌다. 긴 휴식 끝에 만난 그의 얼굴은 높은 뜀틀을 막 뛰어넘은 자의 성취감으로 가득했다.

오래간만에 무대에 서니 어때요.
이창용
: 마슈칸 선생님이 스티븐에게 답답해 보이는 넥타이를 왜 매냐고 물어보면 “이게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라고 하거든요. 딱 그거예요. ‘아, 이게 원래 내 직업이지’ 같은. 작품 하기 전에 [히스 피아노 온 브로드웨이]라고 변희석 음악감독님 콘서트에 게스트로 나간 적이 있어요. 노래 2곡만 부르면 됐는데도 몇 달 만에 섰다고 되게 긴장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 이상으로 긴장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렇지가 않았어요. 오히려 약간 설레기도 했고, 행복하게 시작한 것 같아요. 이번 공연은 스티븐 역에 배우가 4명이라 회차가 많지 않은 편이거든요. 그런데 공백도 길었고 그 사이 감정적인 변화도 있어서인지 한 회 한 회가 너무 아까워요. 한 시즌에 100회 공연도 해본 사람인데. (웃음)

작품을 보면서 이건 이창용의 지난 1년 3개월에 대한 축약본이 아닐까 싶었어요.
이창용
: 천재도 아니고 스티븐보다 경력도 짧지만, 비슷한 지점은 분명히 있었어요. 그동안 지치기도 했고, 공연이 들어오고 연습하고 올리는 과정을 너무 당연시했던 것도 같아요. 마슈칸이 스티븐에게 “엄청나게 독립적”이라 하는데, 저 역시 ‘내가 생각한 게 맞지!’라고 혼자 결단을 내린 적도 많았고요. 조급함이라는 부분에서도 닮았어요. 스티븐이 1막 3장부터 조금씩 변화하는데 그 전까지의 스티븐이 그동안의 저와 정말 많이 비슷했던 것 같아요. 연습하면서 스티븐 대신 가끔 제가 나올 때도 있었지만, 특별히 설정해야 하는 것들이 없고 스티븐이 어떤 사람인지만 잘 전달하면 되니까 오히려 더 편해요. 참 다행이죠. 만약에 제가 쉬지 않고 이 작품을 준비했다면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요.

매번 쉰다 쉰다 하면서도 데뷔 후 3개월 이상 쉬어본 적이 없잖아요. 그래서 긴 공백에 더 놀랐는데 대체 어디 있었어요?
이창용
: 모든 배우들이 마찬가지일 텐데, 특히 뮤지컬배우들은 한 달 쉬면 몸이 금방 다시 근질근질해지거든요. 작년에 [트레이스 유] 끝내자마자 유럽여행을 3주간 다녀왔고, 대학원을 다녔고, 가을엔 영화를 찍었고, 연말에는 준수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여했어요. 여행은 큰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출발하기 전, 같은 시기에 독일을 간다는 친구가 있어서 파리에서 만날까 벨기에에서 만날까 이런 얘기 하는 것도 재밌었어요. (웃음) 공원에서 낮잠 자고, 유명한 디저트 카페도 가고,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고 너무 행복했죠. 파리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야간열차에서는 21살짜리 외국인 대학생을 만나서 얘기도 했어요. 런던을 제일 먼저 가서 [미스 사이공] 하고 있던 (홍)광호 형을 만났거든요. 굉장히 오래된 극장임에도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췄다는 것에 놀랐고, 광호 형이 행복해하는 걸 보면서 과연 나라면 이런 도전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어요. 겁이 많아서 지금도 혼자 가라면 못 갈 것 같지만 진짜 여유롭고 새로웠죠.

새로운 경험 중 하나가 또 영화였잖아요. 무대에 있던 배우들이 영상매체를 하면 어쩔 수 없이 티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피스]에서 전혀 위화감이 없어 놀랐어요.
이창용
: 그게 목표였어요. 잔잔히 가는 거. 튀지 않아야 하는 역할이기도 했고요. 사실 그렇게 해야지 마음먹어도 잘 안 돼요. 사수였던 박성웅 선배님이 하는 말에 “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성웅이 형이 그걸 연습하는 절 보더니 뭘 연습하냐고 그냥 내가 얘기하면 대답하면 되는 거라고 굉장히 쉽게 설명해주셨어요. 첫 촬영 날에는 스태프들 많은 현장에서 노래를 시키셨는데, 저녁 먹고 다른 배우들 오니까 그때 또 하라 그러시더라고요. ‘지금 이 순간’을 불렀는데 (웃음) 제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아니까 그러셨던 것 같아요. 가장 연세 많으셨던 촬영감독님께서 “뮤지컬배우 맞구나!” 이러고 가시더라고요. 덕분에 현장 적응도 잘 할 수 있었죠.

선배들이 예뻐하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웃음)
이창용
: 제가 영화 쪽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를 보면 옛날 생각이 나신대요. 저희 회사(씨제스 엔터테인먼트) 선배님들 중에는 오히려 제가 축복받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더 힘든 상황을 겪었던 분들이 계세요. 늘 조급해하지 말라고 하시거든요. 저도 알죠. 근데 안 돼요. “조급하게 생각 안 해요”라고 말하지만, 조급한 거예요. 그래도 이번에 했던 다양한 경험들 덕분에 요즘은 진짜 자그마한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게 느껴져요.

[올드위키드송] 제안은 언제 받은 거예요?
이창용
: 올 3월쯤이었을 거예요. 영화도 끝났고 학기도 끝나고 하니까 사실 지난 겨울방학이 좀 힘들었어요. 하고 있는 게 없을 때였으니까. 들어오는 작품들 중에 거절한 것도, 오디션을 본 것도, 엎어진 것도 있었어요. 걱정도 생각도 많아지더라고요. 어머니는 항상 저의 선택에 맡기지만, 아버지는 들어온 거 빨리 하라고 하시거든요. (웃음) 동생도 무언의 압박 같은 걸 주기도 했고. 동생이 올해 취직을 했어요. 진짜 감사하게도 한 번에 대기업을 들어갔는데, 회사에 장혁 씨 친형이 있대요. “형도 빨리 잘 돼서 내가 이창용 동생이라는 걸 알리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이 대본을 받았죠. 잘, 될 거예요.

“경험한 걸 음미할 시간이 꼭 필요해”라던 마슈칸의 대사가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창용
: 옛날엔 항상 “아직 부족하니까 잘 해야죠”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요즘은 “잘 될 거야, 잘하고 있어” 쪽으로 생각을 바꿨어요. 다른 공연을 보면서도 예전에는 ‘저거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면, 요새는 ‘저거 하면 나 되게 잘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도 생기고, 의지도 많이 강해졌어요. 물론 실제로도 부족하니까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만, 너무 겸손한 게 때에 따라서는 안 좋아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그런 면이 좀 심했어요. 작년에 최정원 선배님께서 [고스트] 가짜 심령술사 오다메를 너무 완벽하게 하셨잖아요. 그때 분장실 찾아가서 인사드렸었거든요. 보통 배우들은 공연 끝나면 힘들어하기도 하는데, 제가 지금까지 공연 후 뵀던 선배님들 중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셨어요. 톤도 여전히 활기차고 “나도 너무 재밌게 했어!” 이러시고. 선배님처럼 100%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스스로에 대한 만족도는 있어야겠구나 싶었죠.

그동안 주로 소극장 뮤지컬을 많이 했는데, 다음 단계로의 고민도 있었겠네요.
이창용
: 대학원에서 이탈리아 선생님에게 소리 수업을 받는데,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팝적인 소리는 낼 수는 있는데 얇아서 거기에 더 잘 맞는 작품을 찾아야 하고, 클래식한 창법에 관심이 더 생겨서 광호 형처럼 잘하고 싶은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니까요. 소극장, 대극장이라는 구분보다는 작품 스타일에 맞게 좀 더 집중적인 교육을 받고 싶어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울리는 작품도 해보고 싶고. 잘할 수 있는 거 되게 많은데 (웃음) 아직 사람들이 저를 잘 모르나 봐요. 예전에 [맨 오브 라만차](이하 [라만차]) 할 때 [트레이스 유] 프리뷰 공연을 했거든요. 그때 [라만차] 음악조감독님이 오셔서 “너 이런 것도 하는구나. 난 생각도 못 했어”라는 말을 해주셨는데 그때 기분이 되게 좋았어요. 근데 [트레이스 유]도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만 불러재꼈구나 (웃음) 싶어서 좀 더 연구를 했으면 좋았을걸, 이라는 아쉬움도 남더라고요.

그럼 더 어필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이창용
: [오피스] 배우들끼리 회식 때 노래방을 간 적이 있는데 다들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얘 대학로에서 되게 유명해요” 이런 소리 들으니까 기분도 좋고. (웃음) 노래 부르는 걸 워낙 좋아해서 다양한 장르에서 노래를 들려드리고도 싶어요.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위해서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요. 뮤지컬배우들이 노래 진짜 잘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것 같아요. 대중들은 잘 모르니까.

[올드위키드송]으로 그동안의 삶을 반추해본다면, 지금 어느 정도 쯤 온 것 같아요?
이창용
: 착각해서 2막 1장이라고도 말할 수는 있겠는데, 아마도 1막 3장 정도이지 않을까. 마슈칸이랑 커피 마시다 “전 강한 커피가 좋습니다. 일종의 쾌감을 느끼게 해주거든요. 2주 전에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느꼈던 그런 느낌이요”라고 얘기해요. 그쯤인 것 같아요. 저에게 [올드위키드송]은 삶을 돌아보고, 또 다른 시간과 소중한 무언가를 찾아내는 작품이 분명하거든요. 세상 모든 것에 정답은 없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렇게 느끼신 분들도 많은 것 같고요. 되게 초대해주고 싶은 친구가 있었는데 예매를 했대요. 옛날 같으면 분명히 그 초대권을 다른 사람에게 줬을 거예요. 근데 이번에는 그 친구에게 초대권을 주면서 부모님 드리라고 했어요. 어른들에게도 이 작품이 무언가를 드렸으면 좋겠고, 공연 보는 게 정말 돈 아깝지 않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어요. 물론 어느 순간 저도 다시 익숙해지겠죠. 여전히 모르는 것도 경험하지 않은 것도 많고. 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에 감사해요.

알고 지낸 지 7년이 되어 가는데, 확실히 더 솔직해지고 단단해졌네요.
이창용
: 엔딩에서 마슈칸이 스티븐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분명히 모자가 잘 어울릴 머리야. 어떤 모자가 될까”라는 대사를 해요. 스티븐도 저도 그동안 틀을 깨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 말이 저에게는 “어떤 역을 해도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응원처럼 들리기도 하고, ‘단순한 피아니스트가 아닌 주체적인 뮤지션’이라는 느낌도 들어요. 그동안 했던 작품이 벌써 열일곱 개예요. 만족했던 작품도 있지만 뛰어나게 잘한 건 없는 것 같아서 앞으로 잘해내고 싶어요. 제 안에 있는 게 많고, 잘 모르는 것도 있겠죠. 그걸 다 끄집어내고 싶고, 극찬을 한번 받아보고 싶어요. 요새 꿈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왜 그러지? 진~~짜로 잘하고 싶어요.

글. 장경진
사진. 이진혁(KoiWorks)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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