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바사라], 울면서 달려가던 나의 첫 번째 영웅

2015.08.21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 감정이 참 비논리적이라 그렇다. 그냥, 왠지, 자꾸 생각나서, 끌려서, 또 보고 싶어져서, 마음에 남아서, 이유? 이유는 몰라 그냥. 좋아할수록 더 그렇게 된다.

이 코너를 맡고 소개할 작품을 고르는 기준 중 하나는 ‘글로 풀어내기 편할 것’이었다. ‘진짜 재미있습니다. 저 한 번만 믿어 보세요. 강추’라고만 써서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적당한 거리감이 있으면 왜 좋은지, 어떻게 좋은지 쓰기가 쉬워진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크면 차분하게 풀어내기가 힘들다. 그래서 오히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슬쩍 뒤로 빼게 되는 요즘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을 전부 꺼내볼까 한다.

중학교 때 우리 반에는 유미라는 아이가 있었다. 단짝은 아니었지만 만화를 본다는 공통점으로 우리는 종종 이야기를 하곤 했다. 유미는 나에게 그녀의 귀중한 컬렉션을 빌려주었는데, 유미가 얼마나 만화책을 소중해 하는지를 알기에 나는 항상 책을 90도까지만 펼쳐서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미는 일찍부터 취향이 잘 개발된 문화소비자였다. 작품을 보는 폭도 넓었고 단계도 깊었다. 그런 그녀가 ‘이 작가는 나와 이름이 같아’ 하고 수줍게 웃으며 들고 온 책이 전설의 대하순정물, 타무라 유미의 [바사라]였다.

사라사라는 소녀가 있다. 그녀의 쌍둥이 오빠 타타라는 운명의 아이, 적왕의 폭정에서 부족을 구해낼 영웅이다. 그러던 어느 날 쌍둥이 오빠는 소문을 듣고 나타난 적왕에게 목이 베이고 사라사는 오빠 타타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남장을 하고, 검술을 배우고, 동료를 모으고, 모험을 하고, 사랑도 하고, 전쟁도 하는 그런 이야기. 뻔하고 지루한가? 나는 흠뻑 빠졌다. 만약 이 이야기가 ‘평범하다고 하는데 사실은 어마어마한 매력이 있어서 만나는 남자마다 그 여자아이를 사랑하게 되고 도와주는 이야기’ 또는 ‘숨겨진 재능이 있어서 하나를 배우면 백을 깨닫는 천재 이야기’였다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으리라.

사라사를 생각하면 나는 항상 그 장면이 떠오른다. 말을 타고 선봉에서 화려하게 싸우는 사라사를 보고 감탄하는 사람에게 한 동료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를 따르는 이유는 어머어마한 카리스마 때문도, 전설의 영웅이어서도 아니고, 저 아이가 울면서 달려가기 때문이라고, 그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라고. 나에게 사라사는 울면서 달려가는 첫 번째 영웅이었다. 꿈을 쫒는다는 것,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울면서 달려가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 첫 번째 사람.

유미가 어느 날 큰 쇼핑백을 들고 와서는 엄마가 만화책을 버리려고 한다며 지금까지 모은 바사라 전 권을 내밀었다. 네가 잘 보관해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고 아마 중학생답게 고마움도 잘 표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고,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었고, 그 사람은 그걸 또 다른 친구에게 빌려주었다. 그리고 흔한 이야기, 돌려받지 못하여 유미의 [바사라]는 내 손에 없다. 책장에는 애장판이 꽂혀있지만 유미의 [바사라]와는 다르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

오지은
음악 하고 글 쓰는 한국의 30대. 만화를 좋아했고 여전히 좋아한다. 처음 산 단행본은 이은혜의 [점프트리 A+].

디자인. 전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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