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진중권은 어디로 갔을까

2015.07.06

요즘 트위터에서의 진중권은 자주 싸운다. 지난 5월, 장동민의 여성 혐오 발언을 비판하면서도 “유독 연예인에게만 가혹하고 싶어 하는 대중의 욕망. 거기에는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존재한다”고 말했다가 몇몇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받았던 그는, 최근 LGBT 이슈에 대해 발언했다가 페미니즘에 찬동하지 않는 이가 LGBT 운동에 찬동할 자격이 있느냐는 비판을 받자 “신세대는 LGBT를 매우 자랑스러워해서, 브랜드 사용권을 아무한테나 주지 않으려” 한다고 비꼬았다. 물론 진중권은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파이터였다. 비꼬는 말투로 상대방과 논쟁하는 것 역시 익숙한 모습이다. 익숙하지 않은 건, 유독 이 이슈에서 특유의 논리적 섬세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 멘션은 일견 별문제 없어 보이지만 그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의미는 사용에 있다.’

장동민 건에 대해 진중권의 연이은 멘션을 그가 과거 [조선일보]의 기사를 분석하던 방식대로 압축하면 1. 장동민의 발언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다. 2. 한국은 공직자보다 연예인의 도덕성에 더 엄격하다. 3. 연예인은 위험하지 않다. 4. 장동민 비판은 위험하지 않은 대상을 향한 너무 엄한 비판이다. 1은 규범논리로, 2는 귀납논리로 참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3과 4다. 3은 연예인 하나 대 다수 대중의 조리돌림이라는 구도에서만 참이다. 하지만 장동민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말을 내뱉고 낄낄대도 문제없는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에 가깝다. 즉 3은 틀렸으며, 3에 근거한 4도 틀렸다. 그의 문장은 결과적으로 남성의 폭력을 두둔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는 최근 다시 장동민에 대해 ‘광대의 철학’이라 감쌌지만, 진중권이 과거 ‘광대의 철학’이란 글에서 내세운 모델은 스타 학자였던 플라톤을 조롱하고, 최고의 권력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을 멋쩍게 했던 디오게네스다. 만만한 여성을 대상으로 혐오 발언을 하고, 자신을 감싸주는 방송 환경 안에서 안전하게 반성하는 장동민의 무엇을 광대의 철학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이에 대한 적절한 비판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진지한 비판에 성심성의껏 대답하거나 해명하기보다는, 지나가듯 그를 힐난하는 이들의 거친 발언을 꼬투리 잡아 옳은 진중권 대 틀린 극성 페미니스트의 논쟁 구도를 만들어낸다. 가령 진중권이 비판하듯, 여성 혐오 발언을 감싸준 사람은 LGBT 이슈에 대해 발언하면 안 된다는 말은 옳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LGBT 운동에 대한 찬동이 근본적으로 생득적인 이유로 차별받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생득적인 이유로 여성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이들을 결과적으로 감싼 것에 대해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 어떠냐고. 이것은 “요란하게 ‘-ist’를 표방하”는 근본주의자들의 극성이 아니라 자기모순을 인정하고 극복하라는 요구에 가깝다. 숟가락을 얹지 말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관점에서, LGBT 이슈를 브랜드처럼 사용하는 건 진중권이 비난하는 신세대가 아닌 오히려 자기모순에 빠지고도 이 이슈에 대해 발언하는 진중권 본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는 자신을 향한 비판의 가장 날 선 부분보다는 거기에 붙은 욕설, 비아냥거림만 골라 싸운다. 페미니즘 운동 프로젝트인 ‘페페페’에서 진지하게 논박했으니 팟캐스트를 들어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거절했다. 적어도 지식인으로서 무언가에 대해 발언하고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대상의 가장 설득력 있는 것에 맞춰 논지를 전개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지금 논객으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진중권에 대한 우려가 드는 건 이 지점이다. 사실 그는 워낙 수많은 이슈에 발을 걸쳐 싸우느라 종종 틀릴 때도 있었다. 공지영의 [의자놀이]에 인용된 이선옥 작가의 원문에 대한 오리지널리티를 인정하지 않는 발언이 그러했다. 그것이 그의 지식인으로서의 가치를 밑바닥으로 떨어뜨리진 않는다. 항상 틀리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항상 옳은 사람은 없다. 문제는 틀렸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그는 진보 논객인 한윤형의 데이트 폭력 문제가 불거지자 “진보는 여자를 때리면 안 되지만 예외적으로 맞아야 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으로 패고, 보수는 모든 여자는 예외 없이 3일에 한 번은 맞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팹니다”라고 말한 뒤 누군가 이것의 오독 가능성을 지적하자 “그들의 난독증은 그들 스스로 도와야 할 문제”라고 치부했다. 스스로는 진보든 보수든 남자의 폭력성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데이트 폭력에 대한 피해자의 진술이 나온 상황적 맥락에서 이 말은 진보 남성의 폭력이 그래도 조금 더 나은 것처럼 읽힐 수 있다. 이것조차 상대의 난독 문제로 치환해버리면, 남는 것은 정신승리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진중권은 억울할지 모른다. 그가 최근 슬쩍 과거 월장 사태를 꺼낸 건 한국 남성 지식인으로서 그가 얼마나 여성 문제에 발 벗고 나섰는지 증명하고 싶어서일지 모른다. 정말이다. 여성인 노혜경 시인이 인정했듯, 그는 월장 사태 같은 궂은 싸움에 양비론을 택하지 않고 소수 여학생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줄 아는 정말 흔치 않은 진보 남성이었다. 그로선 자신 같은 바이오그래피를 가진 이가 여성 혐오 옹호자로 분류되는 것이 기가 찰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되묻고 싶다. 그때 그 사람은, 대체 어디 간 걸까. 과격한 태도 속에서도 논리만큼은 섬세하게 다루던 토론의 신은, 한국에서 과도한 페미니즘을 경계하는 건 헛소리라는 걸 인정할 정도로 젠더 감수성을 갖췄던 남자는, 시민운동을 별과 별자리에 비유해 설명할 줄 알던 감수성의 문장가는, 하지만 지금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화나기에 앞서 서글픈 일이다. 과거 진중권은 합리적 근대와는 거리가 먼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전범이었다. 안타깝지만 그 치열한 계몽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수준은 거의 그대로다. 그리고 더 안타깝게도, 그 싸움의 가장 앞에 섰던 한 지식인은 변했다. 어쩌면 세상은 한 걸음 더 퇴보했을지도 모르겠다.

글. 위근우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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