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더 나인], 소설처럼 읽히는 연방대법원의 판결

2015.07.03

6월 28일 서울의 퀴어 축제는 독특했다. 압도적인 영상과 사진과 사운드를 주최측이 아니라 반(反) 퀴어 개신교 보수파들이 만들어냈다. 난타 공연을 연상시키는 신들린 타악기 연주, 동성애자였던 차이코프스키의 곡으로 발레 공연, 렌즈를 잡아끄는 황당한 피케팅. 미국의 뉴스 채널 CBS는 반(反) 퀴어 공연을 축하공연이라고 오보를 날렸고, SNS에는 “퀴어 축제 보러 갔다가 반(反) 퀴어 축제에서 앵콜 외쳤다”는 경험담이 돌아다녔다. 원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이분들 누구보다 축제를 화려하게 빛내 주셨다.

이날 반(反) 퀴어 진영은 치명적인 난제를 다뤄야 했다. 개신교 보수파의 엘도라도인 미국, 그 미국의 최종심인 연방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연방 차원의 권리로 인정했다. 퀴어 퍼레이드를 48시간도 채 남겨두지 않았을 때다. 이해할 수 없는 시련에 직면한 어느 투사는 마침내 최고의 적과 손을 잡았다. “북한에서 동성애는 공개총살.” 급하게 손으로 휘갈겨 쓴 이 피켓은 미국에 버림받은 반(反) 퀴어 진영의 이판사판을 고스란히 증언했다. 이제 동성애를 반대하려면 반미 깃발을 들어야 하는 시대다.

역사적인 판결을 내린 연방대법원은 마치 민주주의의 농담 같은 묘한 기관이다. 2000년 대선(부시 대 고어)에서 판사 아홉 명은 3억 미국인을 대신해 사실상 대통령을 결정했다. 연방대법원 판사에게는 ‘9명의 현인’이라는 낯간지러운 별명이 따라다닌다. 일단 임명되면 임기 없는 종신직이다. 미국의 헌법 입안자들은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타락할 가능성을 왕의 독재만큼이나 두려워했다. 그래서 대법원은 ‘민주주의로부터 헌법을 지키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엘리트 원리로 무장한 이 기관에 미국 사회가 보내는 신뢰는 대단해서, 그 막강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마저도 대법원과 섣불리 전쟁을 벌였다가 리더십 위기를 겪었다.

19세기에 내전 직전까지 노예제를 옹호한 것도 대법원이고, 20세기 들어 인종분리 교육을 철폐한 주인공도 대법원이다. 통제받지 않는 아홉 명이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드라마는 황당한 퇴행과 사회를 앞지르는 진보를 오갔다. 이것은 볼만한 스펙터클인가? 확실히 그렇다. 이것은 민주주의인가? 글쎄, 잘 모르겠다. 동성혼 판결에서 소수의견을 낸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동성혼이 헌법의 문제가 아니고, 따라서 대법원이 결론내릴 권한이 없다고 했다(한국 개신교의 소망과 달리 이건 동성혼에 대한 찬반이 아니다). 나는 동성혼 권리 보장이 역사의 진보라고 생각하지만, 이 대목만큼은 로버츠가 옳다고 믿는다.

연방대법원의 작동원리를 파헤친 책으로는 법조 저널리스트 제프리 투빈이 쓴 [더 나인]이 손에 꼽힌다. 이 책은 1990년대부터 2005년까지의 연방대법원을 취재한 논픽션이다. 투빈이 들려주는 2000년 대선 판결의 내막은 아마도 한국어로 볼 수 있는 정보 중 가장 상세할 것이다. 연방대법원의 작동원리에는 분명 아홉 명 사이의 갈등과 질투와 명예욕도 포함된다. 건조한 법조문 너머 다채롭고 때로 격정적인 대법관의 캐릭터가 손에 잡혀 마치 소설처럼 읽히는 것도 미덕이다. 현직 대법관 아홉 명 중 일곱 명이 등장하니, 이들이 동성혼 이슈를 두고는 어떤 논쟁을 벌였을지 상상하며 읽어도 좋겠다.

천관율
[시사IN] 기자. 6년 동안 정치 기사를 썼다. 2014년 11월부터 사회 기사를 쓴다. 농땡이를 보다 못한 조직이 발로 뛰는 부서로 보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정확하다.

디자인. 전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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