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문으로 들었소]│① ‘갑’은 진화한다

2015.03.31


“귀족성을 내세우면 안 돼. 차별에 민감한 대중들이 상처 받거든.” SBS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대한민국 상위 0.1%, 대형 로펌 한송의 대표, 자타공인 ‘균형인’ 한정호(유준상)는 아들 인상(이준)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신입 변호사 채용에 있어 그의 기준은 확고하다. “배경도 점수로 환산했습니다. 우리 다음 세대는 자력으로 이런 인맥을 만들 수가 없어요.” 한정호가 ‘요즘 전직’과는 달리 높게 평가하는 ‘그 시절 전직’ 장관 딸인 아내 최연희(유호정)의 드높은 자긍심은 누대 명문 출신이라는 데서 나오지만, 그 명가의 뿌리가 친일파에 있음은 묻어 둔다. 자신들이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살고 있다 믿으며 후손들에게도 귀족끼리의 세상을 물려주려 만반의 준비를 기하고 있던 이들의 완벽한 세계는, 인상의 아이를 가진 간판 집 딸 서봄(고아성)이 찾아오면서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정호와 최연희는 서봄의 머리채를 잡지도, 물을 끼얹지도 않는다. 합의금 제시는 물론 당사자는 알지도 못하는 족보 세탁까지 모든 것은 고용인들의 손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진행된다. MBC [아줌마](2000)에서 JTBC [아내의 자격](2012), JTBC [밀회](2014), [풍문으로 들었소]까지, 정성주 작가·안판석 감독 콤비의 작품 속 ‘갑’의 재력과 사회적 위치가 상승하면서 ‘갑질’도 진화했다. 세련되게, 하자 없이. ‘갑은 악이고 을은 선’이라는 구도 역시 점점 흐릿해져 왔다. 그래서 [풍문으로 들었소]의 중심은 ‘신데렐라’ 서봄이 아니라 전에 없이 사랑스러운 ‘갑’, 한정호와 최연희다.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덕에 악다구니 한 번 쓸 일 없이, 손톱 밑 거스러미 하나 생길 새 없이 살아온 이들은 ‘힘에 의한, 힘을 위한, 힘의 논리’로 제국을 공고히 하고, 선대의 유산과 전통을 지킴으로써 유한계급의 본분을 다할 뿐이다. 하지만 부와 권력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대단히 노회한 한편, 고용인이 없는 일상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력하거나 백지에 가까울 만큼 무지해 어린애 같기도 한 이들이 위선의 가면을 빼앗기고 허둥대는 모습은 통쾌할 뿐 아니라 귀엽기조차 하다. ‘갑’인데, 밉지도 않다. 


반면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계급이 고착화되며 여유로운 마음가짐이나 품위 있는 태도 등 인성의 영역조차 개인의 노력과 수양으로 획득할 수 있는 데서 점점 멀어지는 현실은 ‘을질’을 낳는다. 밤낮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나운서 시험에 도전하는 서봄의 언니 서누리(공승연)는 “너무 ‘없어 보여’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좌절한 뒤, 사돈집과 연줄이 닿아 취업에 도움 받을 수 있기를 내심 기대한다. 치열한 노력보다 “사랑 많이 받고 부모가 잘 관리해 준 티”가 우선시되는 것은 자수성가의 신화가 더 이상 ‘모태부자’나 ‘모태미녀’에 대한 선망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출발선이 다른 사람과 유능한 사람, 훌륭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사회에서 남보다 더 가지고 태어난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이라 칭송받는다. 한정호의 은근한 차별과 무시에 분개하던 서봄의 아버지(장현성)나 삼촌(전석찬) 역시 그에 대해 비난하는 한편 경외감을 표하며 “우리가 부자나 힘 있는 사람들에 대해 편견이 있다”고 지레 반성하기도 한다. 한정호가 서봄의 가족들에게 씌우고 싶어 하는 ‘청렴한 서민’의 이미지는 또 다른 판타지다. ‘을’이 자존심을 지키고, 비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충분히 가져야 한다.

서봄이 한정호와 최연희의 관리 아래 자유를 제한당하면서도 강북 재개발지역 서민 가정의 딸일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밝은 미래를 획득할 기대에 부푸는 것도 자신의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봄은 한정호가 제공하는 시스템에 편입해 기득권으로 살게 될까? 그것이 해피엔딩일까? 이처럼 [풍문으로 들었소]는 작품마다 꾸준히 계몽을 시도해 왔던 정성주 작가가 내놓은 새로운 숙제이자, 한 발 더 나아간 질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매력적인 ‘갑’과 생활고에 쪼그라든 ‘을’을 통해 우리는 어떤 세계를 볼 것인가. 작가는 답을 그대로 비춰 보이는 대신 우회적으로, 폭소와 실소가 교차하는 생각의 선로 위에 시청자들을 데려다 놓는다. 한정호가 읽고 해석하게 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중 ‘자유경제의 기본 이념’에 대해 서봄이 “누구나 능력껏 돈을 벌고 재산을 모으도록 해준다는 건 시장을 통제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칙이며 부익부 빈익빈의 출발입니다”라며 텍스트에 드러나 있지 않은 부정적인 측면까지 해석해 말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져 있다가 서봄과 함께 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한 인상 역시 ‘우매한 대중’이라는 아버지의 전제에 대해 “대중을 무시하거나 대중에 대해 무지하거나”라고 반박한다. 그래서 [군주론]을 둘러싼 한정호, 한인상, 서봄의 계속되는 토론은 작품 전체에 대한 은유와도 같다. 독자이자 시청자인 대중에게 남는 것은 선택이다. 보이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길 것인가, 보이는 것을 넘어 사유하는 과정에서 불편함에 무뎌지지 않고 의문을 제기할 것인가.

글. 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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