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지 않은 여자들], 김인영의 다시 쓰는 여성사(史)

2015.03.12

김인영 작가의 여성들은 대부분 ‘선녀와 악녀’의 상투적 이분법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다. 가장 전형적인 권선징악 스토리인 초기작 MBC [진실]에서조차 자영(최지우)과 신희(박선영)가 똑같이 변신하는 대리 시험 에피소드로 착한 주인공과 악독한 라이벌이 근본적으로는 서로의 거울상 관계임을 징후적으로 드러냈고, 대표작 KBS [태양의 여자]에서는 운명의 샴쌍둥이 같은 자매를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의 고정된 구도를 역전시킴으로써 복수극을 여성들의 욕망의 생존 게임으로 그려냈다. 여성을 전형성 안에 가두는 이분법이 해체되면서 김인영 작가의 여자들은 입체적인 캐릭터로 빚어질 수 있었다.

KBS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이런 김인영월드의 종합판과도 같다. 이 드라마는 강순옥(김혜자)과 장모란(장미희)의 연적관계, 김현숙(채시라)과 나현애(서이숙)의 원수관계, 김현정(도지원)과 후배들 간의 직장 내 라이벌관계 등 그동안 김인영 작품 속에 등장해왔던 여성간의 주요 갈등구도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 대립구도 안에서 흔히 선악으로 구분되기 쉬운 역할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그녀들은 서로 갈등하고 경쟁하지만 이야기 안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실은 그들 모두가 여성의 삶을 제한하는 부조리한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상처 입은 존재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가령 순옥을 고통스럽게 한 모란의 불륜은 ‘세컨드 집안의 천한 피’에 대한 편견의 상처에서 시작됐고, 현숙을 학대한 현애의 차별의식과 뒤틀린 속물근성은 아들을 기원하던 집의 천덕꾸러기 막내딸 ‘나말년’이었던 시절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비롯됐다. “저 아줌마가 방을 빼야”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며 현정을 헐뜯는 후배들의 심리에도 직업적 생명이 짧은 여성 아나운서들의 불안이 깔려있다. 드라마는 주인공들에게 시련을 안겨 준 여성들까지도 그저 ‘악녀’가 아니라, 단순하게 규정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착하지 않은 여자들’이라는 통칭 안에 포함하면서 여성들 간의 갈등구도 너머에 있는 근본적인 성차별적 구조를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시선이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현숙의 딸인 정마리(이하나)의 작업을 통해서다. 앞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자산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마리는 과거의 뉴스 기록을 살피던 중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된다. 레이프 가렛 내한 당시 현숙의 열광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돼 “수렁에 빠진 딸”이라는 질타를 받고 고교에서 퇴학까지 당했다는 사실이다. 마리는 ‘1969년 클리프 리처드 내한공연부터 1980년도 레이프 가렛을 거쳐 1992년의 뉴키즈 온 더 블록 내한까지’ 소위 ‘여성들의 광기어린 난동’으로 주목받았던 사건들을 떠올리며 시대가 다름에도 여성들의 열정과 욕망에 늘 “타락”이라는 낙인을 찍는 한결같은 시선에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공적 기록에는 보이지 않던 여성들의 고독의 역사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김인영 월드 안에서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정마리의 작업과 흡사하다. [진실]에서부터 주로 2,3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오다 MBC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40대 기혼여성의 자아 찾기를 끌어들여 여성적 서사의 범위를 넓힌 김인영 작가는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 이르러서는 3대에 걸친 여성 가족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동안의 주제의식을 한층 더 확대하고 통합한다. 드라마가 집중하는 것은 “뜨거운 피”를 지닌 여성들의 그간 억눌려왔던 욕망과 목소리다. 이제껏 순옥은 집을 떠난 남편 대신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현숙은 ‘못배웠다’는 편견에 주눅 들어, 현정은 경쟁이 치열한 방송가에서 버티느라, 다들 삶의 다른 가능성을 차단한 채 살아왔다. 그 ‘견디는 삶’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 그녀들의 분노가 순옥의 버선발 하이킥과 현정의 하이힐 발차기를 거쳐 현숙의 ‘무릎 꿇으라’는 외침으로 하나씩 터져 나오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래서 이 3대의 여성들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발화’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순옥은 요리강좌에서 기혼여성들의 심정을 속시원한 입담으로 대변하고, 앵커인 현정에게는 프로그램이 폐지되자 방송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희망 에세이’로 풀어낼 기회가 다가온다. 가장 무시당하는 현숙에게도 ‘엉뚱한 상상력’과 시적 재능이 있고, 강의를 빼앗긴 마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된다. 그것은 지금 김인영 작가가 드라마를 통해 여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과 같다. 김인영 작가와 같은 드라마 작가나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여자들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말하고 기록할 기회를 잡은 이들이다. 이제 김인영 작가가, 그리고 여자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를 지켜볼 때다.

글. 김선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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