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크러쉬│③ 우리가 사랑한 이야기 속 매력적인 일곱 여자들

2015.03.10

많은 엔터테인먼트가 남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빛나는 여자들은 언제든 존재해왔고, 그들을 읽고 보고 느끼며 여자는 성장한다. 매력적인 여자의 대명사가 된 [작은 아씨들]의 조부터 성소수자들의 행복을 위해 용기 있게 움직이는 연극 [프라이드]의 실비아까지, [아이즈]에서는 우리가 사랑한 이야기 속 매력적인 일곱 여자를 꼽아봤다. 물론 ‘매력적’이라 느끼는 기준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일곱 여자들을 통해 찾은 보편적 기준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을 때 말이다.


[작은 아씨들] 조
“너는 오래된 세상에 묻혀 있고 난 새 세상을 갈망하니까 생각이 다를 수밖에. 넌 가장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 난 가장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살 테니. 난 돌멩이와 야유 소리가 난무하는 세상이 더 좋아.”


아마도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동네 친구들과 소설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 역할 놀이를 할 때 조가 아니라면 안 하겠다고 난리를 쳤던 바로 그 순간. 그녀가 글을 쓰니 나도 쓰겠다 결심하게 할 만큼, 조세핀 마치, 마치 가의 둘째 딸은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치마를 입지 않는 여자를 상상도 하지 못하던 시대에 “남자아이들의 놀이나 방식”으로 살면 왜 안 되는지를 묻고, 자신이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아가는 이 거침없는 소녀에게 어떻게 매혹되지 않을 수 있는가.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며 세상과 부딪히던 시절이 지난 뒤에도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한 조는 심지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롤모델로 삼을 만하다. “여자아이처럼”의 세계를 거부하는 데에는 19세기의 미국이든 21세기의 한국이든 다를 것 없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스밀라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뚱뚱한 남자애, 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밀라는 눈에 대한 감각만이 아니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던 모든 것들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녀 또한 여성이며 그린란드와 덴마크 혼혈인 “그들 중 한 사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한 소년의 죽음에서 출발해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데까지 나아가는 이 소설은, 사건을 추적하는 스밀라의 시점으로 쓰였다. 스밀라의 눈으로 차가운 세상 속에서 밀어내진 한 소년의 죽음을 바라보다 보면, 그녀 또한 너무도 오래 차가운 눈을 밟고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 순간,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세상은 아무런 관심이 없지만 자신에게는 가장 중요한 진실을 밝히려고 애쓰는 이의 외로움은, 같은 시선으로 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이 두꺼운 소설을 덮으며 작게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보는 것으로, 그녀가 이사야에게 했던 “결코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계약”을 대신한다. 가장 차가우면서 따뜻한 이름, 스밀라 야스페르센.


[미란다] 미란다
“지금까지 저는, 싱글도 재미있게 산다는 것을 보여줬죠!” (주걱과 당근, 계란으로 만든 가짜 관객 앞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진지하게 지휘한다.)


185cm의 키에 그에 걸맞거나 실은 좀 더 나갈 몸무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나이로 34세, 마침내 몸에 맞는 드레스를 찾아냈지만 트랜스젠더를 위한 것이었던 그녀의 이름은 미란다. 장난감 가게의 사장으로, 뉴스의 비만 리포트 마지막에 클로즈업되었다는 충격 정도를 제외하면 별다른 고민 없이 살아간다. 그래서 이 영국 드라마 속 미란다의 삶이야말로 30대 비혼 여성이 꿈꿀 수 있는 최상의 삶이다. 미란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고 아무리 하찮고 유치해 보여도 그 일을 하며, 엄마를 비롯한 세상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는 무딘 정신 또한 가지고 있다. 심지어 장난감가게 수입이 신통치 않아도 먹고살 정도의 재력은 있다. 정말 완벽하지 않은가. 단 한순간의 진지함도 참지 못하는 그녀가 면접 중 책상 위에 올라가 노래를 부를 때, 그녀와 듀엣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무산되었다는 시즌4 제작을 위해 아고라 청원이라도 넣고 싶은 심정이다.


[나를 찾아줘] 에이미
“닉은 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한 것은 진짜 내가 아니었다. 닉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했다. 나는, 내가 종종 그러듯이, 특정한 인격을 가장하고 있었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내가 되어야 해”라는 뻔한 노래 가사를 있는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영화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다. [나를 찾아줘]는 부모와 세상의 과한 기대 속에서 “필사적으로 완벽해지려고” 애쓰던 에이미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만들어낸 이야기로 세상과 남편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세상 전부를 완벽히 속이고, 남편을 살인자로 만드는 이 이야기 속에서 에이미는 단순한 주체를 넘어 이 이야기의 작가-곧 창조자가 된다. 완벽한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고 대중의 구미를 딱 맞춘 에이미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연히 그녀 자신이다. 온 국민이 아끼는 동화 속 사랑스러운 소녀가 타인의 시선 속 모습 그대로 박제되지 않기를 선택하는 데에서부터, 동화가 아닌 어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쩌면 영화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를 연기한 로자먼드 파이크를 위해 필요했던 상은 여우주연상이 아닌, 주연상이었을지 모르겠다. 


[위키드] 글린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는 거라 사람들은 운명을 찾아내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겨서 힘을 준대, 성장할 수 있도록. 어제와 다른 나의 인생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널 만났기에.”


뮤지컬 [위키드]의 주인공은 엘파바다. 엘파바는 초록색 피부로 인해 편견 속에 살아왔으나 용기 있게 거짓과 맞서 싸울 줄 아는 소녀로, 결국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 “날아올라 중력을 벗어나” 떠나가는 행복한 결말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정작 글린다에게 있어서 엘파바의 드라마는 비극에 가깝다. 글린다는 모두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소녀였지만 정작 그녀가 사랑했던 피에로는 엘파바를 선택했으며, 엘파바가 가진 마법사로서의 재능 또한 글린다에게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린다는 엘파바의 뒤에 서서 초록 마녀를 둘러싸고 벌어진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진실을 숨기는 일을 기꺼이 감당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엘파바를 만나고 그녀의 친구가 된 뒤로, 글린다의 인생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엘파바가 사랑의 힘을 빌어 동화의 세계를 벗어날 때, 글린다는 홀로 슬픔을 견디며 자신을 변하게 한 존재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스스로 어른이 된다.


[프라이드] 실비아
“나 무지무지 노력하고 있어. 왜냐면, 나는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네가 행복하길 원해. 나도 행복해지고 싶고. 그렇지만 너보다 내가 먼저 행복했으면 좋겠다.”


연극 [프라이드]에서 1958년의 실비아는 남편 필립의 성정체성을 알고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한 여자고, 2000년대의 실비아는 게이 작가 올리버를 친구로 둔 밝고 건강한 스트레이트 여자다. 하지만 실비아는 게이의 ‘자부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극 속의 인물이면서도 클로짓 게이 남편 몰래 뒤에서 눈물짓는 여자나 게이 절친을 악세서리처럼 여기는 여자의 이미지에 갇히지 않는다. 모성애의 화신이나 범접할 수 없는 여신의 이미지로 남지도 않는다. 실비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가장 용기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남편에게 존재하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는 대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떠나면서도 그가 진정한 자신을 찾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를 불어넣고, 그 기도는 몇십 년의 시간을 건너 그녀가 사랑하는 존재들의 영혼에 가 닿는다. 결국 그녀가 부르는 목소리는 오래 길을 잃었던 두 남자의 삶을 마침내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보는 사람까지도. 이건 올리버의 입을 빌린 그녀를 향한 고백이다. “고마워 실비아. 그냥. 실비아여서.”


[오오쿠] 오오쿠의 쇼군들
“망하면 망하는 대로 이 나라의 마지막 한 사람이 죽음을 맞는 그 날까지 그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것이 우리의 소임이라 생각하면 되지 않겠느냐.”


일본 막부시대, 적면포창이라는 정체 모를 전염병으로 젊은 남자들이 죽어 나가고 남녀의 성비가 심한 불균형을 이루게 되었다는 가상의 역사를 배경으로 만화 [오오쿠]는 시작된다. “모름지기 남자란 것은 합당한 집안에 사위로 들어가 거기서 산더미만큼 아이를 만드는 것이 가장 복 받은 인생”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에서,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 역시 여자다. 흥미롭게 재구성된 이 가상의 역사 속에서 여성 쇼군들은 남성의 자리를 임시로 맡아 명예 남성으로 복무하는 것이 아닌, 역사를 이끌어가는 온전한 주체로 등장한다. 작가 요시나가 후미는 단순하게 남성과 여성의 위치를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대를 이어가기 위해 아이를 낳아야만 하는 여성의 현실이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그려낸다. 상상 속에서마저 남자 인구가 여자 인구의 1/4이 된 뒤에야 가능한 이야기라는 점은 어쩐지 씁쓸하지만, [오오쿠]의 쇼군들이 오늘 만화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며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인 것만은 분명하다.

글. 윤이나(칼럼니스트)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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