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VS 귀여니 소설

2015.03.09
“아직 처녀라고?” 대사와 함께 극장의 모든 관객이 웃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이하 [그레이])의 원작 소설은 미국에서 엄청난 판매 부수를 기록했고, 영화도 상당히 흥행했다. SM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는 야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공개된 영화 [그레이]는 끈적한 에로물의 그림자도 아니었고, SM의 그림자도 아니고, 주로 10대 주인공의 로맨스를 다룬 신조 마유나 귀여니, [트와일라잇]의 그림자를 더욱 닮아 있었다. 무엇보다 귀여니의 소설 못지않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오글거림’이 있었다. 그래서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는 과연 귀여니, 신조 마유 등의 작품에 비해 어느 정도일까. [그레이]를 기준으로 가끔은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거나, 귀를 틀어막아야 할 만큼 부끄러움을 느끼며 힘들게 봐야 하는 작품들을 꼽아보았다. ‘항마력(일명 ‘오글거리는 것’에 대한 내성을 이르는 속어)’ 테스트를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혼자 보기 억울해서다.


[그레이] ‘크리스찬 그레이’ VS [트와일라잇] ‘에드워드’
[그레이]: 27세의 억만장자 CEO, 말끔한 슈트, 거기에 잘생긴 외모. [그레이]의 크리스찬 그레이는 “무척 젊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친구를 대신해 아나스타샤(이하 아나)가 그를 인터뷰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그레이]의 원작에서는 그레이를 원격통신 사업, 제조업 투자를 하고 직원 4만 명이 넘는 회사의 CEO로 묘사한다. 영화에서도 헬기를 띄우고, 그날 기분에 따라 자동차를 골라 타고, 아나에게 맥북과 자동차를 선물하는 것은 기본. 하지만 진정한 ‘뻥’의 끝은 그레이가 27세고, 이런 부를 “자신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쯤 되면 아나가 그레이에 대해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잘생겼지?”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다.

[트와일라잇]: [그레이]가 [트와일라잇]의 팬픽으로 출발해서인지 [트와일라잇]은 [그레이]보다는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으로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를 묘사한다. 에드워드가 뱀파이어이긴 하지만 이것은 아예 장르 판타지이기 때문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고, 그가 고등학생이면서도 볼보를 몰고 다니는 것 역시 불사나 다름없는 뱀파이어이기에 오랫동안 재산을 축적해서 가능한 일이다. 최소한 에드워드가 능력으로 돈을 벌었다는 묘사는 없다. 그리고 [그레이]에 비해 여자 주인공 벨라가 에드워드를 묘사하는 문장 역시 조금이라도 더 디테일하다. “이토록 완벽한 인간이 실존인물인 게 믿기 어렵다”는 말과 함께, 얼마나 잘생겼는지 그의 얼굴을 보느라 입은 옷을 기억 못 할 정도라는 묘사가 따라붙는다. 생각해보면, [꽃보다 남자]는 정말 리얼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레이]의 “Still virgin?” VS [두근두근 프레이즈]의 “너 처음이지?”
[그레이]: “아직 처녀라고?(Still virgin?)” 그레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묻는다. 그리고 그레이는 아나가 버진이라는 이유로 더욱 빠져든다. 그리고 하는 말.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러 가자.” 아나를 침대로 이끄는 그레이의 얼굴에서 대체 왜 그가 아나에게 끌렸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레이는 어쨌건 아나를 좋아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움직인다. 물론 근거가 있긴 있다. 아나는 그레이를 인터뷰할 때 “사람들이 당신을 잘 안다고 하는데, 왜 나는 그게 아닌 거 같죠?”라고 질문하고, 그레이는 인터뷰가 끝난 뒤부터 아나에게 관심을 보인다. 이건 아무래도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의 변주 아닐까.

[두근두근 프레이즈]: 신조 마유의 만화 [두근두근 프레이즈](과거 [섹시보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에는 정말로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이런 대사를 에둘러 말하지 않고 그대로 말한다는 점이야말로 신조 마유 작품의 정수. 그의 다른 작품 [러브세레브]에는 “너 처녀인가?”, “와라, 안아주지”처럼 이 세계에 빠져든 사람이 아니면 눈을 뜰 수 없는 대사가 나오고, 심지어 남자 주인공은 “처녀만 사랑하는” 캐릭터다. [두근두근 프레이즈]의 남자 주인공 사쿠야 역시 여자 주인공 아야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고생이어서 좋아한다. 심지어 인기그룹 ‘루시퍼’의 “천성적인 미성 보컬”인 그는 아야네가 처녀이기 때문에 야한 가사를 쓸 때 “상상하며 쓰는” 재주가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내 눈, 내 눈!


[그레이]의 그레이의 변덕 VS [그놈은 멋있었다]의 지은성의 변덕
[그레이]: 아나에게 커피를 마시자고 한 것은 그레이였지만, 커피를 마신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당신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야”, “날 멀리해”. 그리고 다음 날 아나에게 고전 소설 [테스] 초판본을 보낸다. 책을 돌려보내겠다는 아나를 향해 그레이는 “당신에게 혼란을 준 것 같아서”라고 사과한다. 술에 취한 아나를 보면 화를 내고 결국엔 그가 있는 술집까지 찾아온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그냥 “이게 뭐하는 짓인가”라고 생각하면 된다. 심지어 이 남자는 아나의 몸과 정신적인 부분까지 소유하길 원하면서도 자신의 몸은 만지지 못하게 한다. 과거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아나는 그레이에 푹 빠진다. 영화에서 아나는 그레이가 피아노를 칠 때마다 “당신의 연주는 언제나 슬퍼요”라고 말하는데, 이 사람아 단조를 치면 당연히 슬프다고.

[그놈은 멋있었다]: 한때 한국의 중․고교생들을 휩쓸었던 귀여니의 소설 [그놈은 멋있었다]의 ‘지.은.성’도 만만치 않다. 한예원과 실수로 키스를 한 ‘지.은.성’은 스킨십에 민감하다며 키스를 하면 무조건 사귀어야 한다고 우긴다. 이유는 아버지가 에이즈에 걸려 왕따를 당해서이고, 막무가내에 감정 표현에 서툰 성격 역시 사랑받고 자라지 못해서라고 한다. 자신의 생일 전날 한예원이 약속이 있다 말해도 콘도까지 빌려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이 ‘지.은.성’이다. 물론 한예원이 오지 않으면 화를 내며 헤어지는 행동도 뒤따른다. 이쯤 되면 엉덩이를 맞아야 하는 건 아나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레이]의 호세와 폴 VS [오란고교 호스트부]의 호스트 부원
[그레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좌절해서 얼굴을 찌푸렸다.” 소설 [그레이]에서 아나가 자기 자신을 묘사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상할 만큼 아나 주변에는 아나와 키스를 하고 싶어 하는 호세,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듯이 내 어깨를 감싸 안는” 폴, 그리고 그레이가 있다. 그리고 그레이는 아나에게 “피부가 정말 아름다워”, “정말 좋은 냄새가 나”, “너는. 아주. 달콤해.”, “난. 널. 원해. 몹시도.”처럼 ‘로맨틱. 성공적’에 필적할 표현을 하며 아나를 유혹한다. [그레이]의 화자가 아나라는 걸 생각하면 [그레이]는 결국 시험 날 “나 어제 공부 못 했는데”라며 100점을 맞는 이른바 ‘넌씨눈’ 같은 친구의 이야기인 것이다.

[오란고교 호스트부]: [그레이]가 시험에서 100점 맞은 친구라면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일본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오란고교 호스트부]는 1000점쯤 된다고 생각하고 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나는 예쁜 것도 아니고, 평범한데 남자들이 다 날 좋아하네”의 극한이다. 여자 주인공 하루히는 “입학하는 데 혈통과 재력이 필요한 오란고교에서 남아도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만든 호스트부”에 우연히 들어가고, 거기서 갖가지 꽃미남들을 만난다. 호스트부 부원들은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입으로 먹여준다면 어떨까?”, “훌륭하군, 이 감격을 몸으로 표현해도 될까?”와 같은 대사들을 쉬지도 않고 날린다. 게다가 하루히는 스스로 예쁘다는 자각이 없으나 알고 보면 미소녀로, 오란고교 호스트부의 남자 부원들 모두 하루히를 좋아한다. 특히 이런 클리셰를 비튼 면이 있는 원작 만화와 달리, 이것이 영상화된 드라마의 파괴력은 [그레이]를 뛰어넘는다.


[그레이]의 SM VS [타나토스]의 연기
[그레이]: [그레이]는 SM에 대해 자세히 나온다. 실제로 작품에 쓰이는 ‘바닐라’란 용어는 에세머(smer)들이 일반인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이고, 에세머들은 [그레이]처럼 실제로 도미넌트(지배자)와 서브미시브(피지배자) 간 규칙을 정하고 합의하에 관계를 맺는다. [그레이]는 이런 점들을 상당히 자세히 기술하며 호기심을 자아낸다. 하지만 아나가 그레이의 요구 조항을 거부하면서 영상의 수위는 ‘바닐라’ 수준에 머무른다. 여성이 성적인 쾌감을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리는 모습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신데렐라 스토리에 SM의 이야기를 가볍게 이용하는 수준이다.

[타나토스]: 무라카미 류의 소설들 역시 이런 가학적인 성적 취향이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그레이]처럼 소재 차원이 아니라 이런 관계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끌어올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소설의 화자 레이코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됐고, 우연한 기회에 SM 플레이 연기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간다. 소설 속 수위는 차마 지면에 적을 수 없을 정도로 가학적이지만, 궁극적으로 현대인들의 비극적 결말을 그리는 [타나토스]는 이런 소재가 단지 외설적인 의도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그레이]와 비교하기는 미안할 정도의 작품이다.

글. 이지혜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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