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미, 힐미]│③ 본격 미스터리 소설 [킬미, 힐미의 재구성]

2015.02.10

킬미 힐미 떡밥. MBC [킬미, 힐미]를 검색할 때 뜨는 자동검색어 중 하나다.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와 소위 ‘병맛’에 가까운 개그, 그리고 치유에 대한 서사까지 정말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뒤섞인 이 작품에서, 서사의 긴장감을 부여하는 건 미스터리로서의 측면이다. 처음에는 주인공 차도현(지성)이 어쩌다 7개의 인격으로 분화됐는지 정도로 시작되던 수수께끼는 할아버지 차건호(김용건) 회장과 며느리 민서연(명세빈)의 죽음, 승진그룹 대화재와 아버지 차준표의 의식 불명, 그리고 민서연의 숨겨놓은 자식에 대한 소문까지 말 그대로 무수한 ‘떡밥’을 작품 곳곳에 흩뿌려놓았다. 과연 이 작품 안에 숨어 있는 승진그룹과 차도현을 둘러싼 수수께끼의 진실은 무엇일까. 극 중 얼굴 없는 추리소설가 오메가이자 실제로 이 사건을 쫓고 있는 오리온(박서준)의 새 소설에서 그 진실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아이즈]는 아직 발표되지 않은 오메가의 소설을 대신해 최대한 미스터리 장르 소설의 법칙에 충실하게 [킬미, 힐미]의 ‘떡밥’을 재구성해보았다. 심심풀이로 만족하거나, 성지가 되거나.



CHAPTER 0. 화재
킁킁. 준표는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잠에서 깼다. 이게 무슨 냄새였지, 비몽사몽 중이라 빨리 떠오르진 않았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지금 뭔가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온 순간 발에 닿는 차갑고 찰랑대는 느낌과 함께 잠이 확 달아났다. 석유다.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코를 찌르는 냄새와 함께 석유가 마루에서 침실 문으로 흘러들어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머리에서 본능적인 경보음이 울렸다. 하지만 침실 문을 열고 나선 그에게 그보다 본능적인 외침이 울렸다.
‘우리 도현이!’
그는 현관이 아닌 7살 난 아들 도현의 방을 향해 미끄러운 마룻바닥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며 달려갔다. 대저택의 규모가 이토록 저주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도현의 방문 앞까지 온 그는 낯익은 얼굴과 석유통의 실루엣을 보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만으로도 심장이 덜컹했지만, 무엇보다 그 실루엣을 비추는 건 그가 들고 있는 성냥불이었다. 그리고 성냥불은 곧 바닥을 향해 던져졌다.
“안 돼!”
준표는 외치며 그를 덮쳤다. 그리고 불길이 뒤이어 준표를 덮쳤다.

CHAPTER 1. 귀국
‘얼마 만의 한국이지.’
공항에서 나온 도현은 기지개를 켜며 거의 20년 만에 돌아온 고국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할머니의 엄명으로 반 강제로 하게 된 귀국이지만, 그래도 곳곳에서 들려오는 한국어와 곳곳의 한국어로 된 안내문을 보는 건 반가웠다. 오늘 하루 정도는 그냥 서울의 야경을 보며 마음 편히 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되지도 않을 망상은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바로 깨졌다.
“도련님, 타시죠.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현은 아무 말 없이 차 뒷자석에 탔다. 더는 이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다만 차라도 막혀 되도록 할머니와의 만남이 미뤄지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승진그룹의 가장 정통한 후계자 차준표의 아들 차도현이 한국에, 승진그룹에 돌아왔다. (후략)

CHAPTER 4. 흉내
(전략) ‘아… 안 돼. 오늘 이사회 출석이란 말이야.’
도현은 정신을 최대한 부여잡으려 했지만 의식은 빠르게 희미해져 갔다. REM 수면을 하듯 감긴 눈에서 안구를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더니 도현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깨어났다. 신세기였다. 그는 평소처럼 아이라인을 그리는 대신 거울을 보며 짐짓 점잖은 표정을 지어보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누가 봐도 도현 같았다. 그는 만족한 듯 평소라면 거들떠도 안 볼 도현의 슈트를 걸쳤다. 안 비서 정도라면 모를까 수행원들을 속이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의 인생을 돌려받아야 한다.

CHAPTER 6. 의심
추리소설가이자 아마추어 탐정인 오메가는 조간신문을 보는 순간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신문은 승진그룹의 후계자이자 20년 전 화재로 의식불명 상태인 차준표 회장이 어제 오후 사망했다는 소식을 그의 기구한 인생 스토리와 함께 묶어 소개했다. 승진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내정되었지만,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하던 남자. 비운의 교통사고로 아내와 아버지를 동시에 잃은 남자. 자신의 아버지와 아내가 내연 관계이자 둘 사이의 아이가 있더라는 추문을 견뎌내야 했던 남자. 그리고 20년 전, 대저택의 화재에서 혼외정사로 얻은 아들을 남기고 의식불명에 빠졌던 남자. 신문은 이 불운한 남자의 죽음과 함께 그가 생전에 작성한 유언대로 그가 소유한 주식이 모두 얼마 전 귀국한 아들 차도현에게 상속된다는 것 역시 밝혔다. 상속세로 빠져나가는 것을 계산해도 그룹 서열 2위가 확정되는 양의 주식이다. 오메가는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추적해온 소재에 새로운 이슈, 아니 새로운 퍼즐 조각이 더해졌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품었던 가설이 새롭게 보완되었다. 20년 전 화재의 범인이 자신의 아버지까지 죽였다.

(중략)

“작가 양반께서 오늘은 어떤 일이신가?”
석호필 박사가 반갑게 오메가를 맞았다. 오메가가 소설 중 사이코패스나 분노조절 장애, 다중 인격 같은 소재를 다룰 때 자문을 구하면서 제법 막역한 사이가 된 둘이었다. 오메가는 에두르지 않았다.
“박사님, 차도현 아시죠?”

CHAPTER 7. 추리
(전략) “도현 군이 20년 전 화재의 범인이라고?”
석호필 박사는 기가 차다는 듯이 되물었다. 오메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장 간단히 설명되는 길을 걸어보는 겁니다. 그 화재를 통해 얻을 게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의식불명이 되었던 차준표 차기 회장? 아들을 잃게 생긴 서태임 현 회장? 물론 차준표의 사촌인 차영표가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승진그룹 저택을 외부인이 침입해 불을 지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당시 자택 안에 있었고 현재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걸 얻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억측이야. 지금 도현 군이 얻은 건, 어차피 언젠가 얻을 거였어.”
“드러난 바로만 보면 그렇죠. 하지만 그 집엔 또 다른 존재, 차도현 입장에선 미래를 위해 없애야 할 존재가 있었습니다. 바로 차건호 회장과 민서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죠. 차도현은 미래의 경쟁자인 아이를 화재와 함께 해치운 겁니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나도 들었지. 하지만 증권가 찌라시나 다름없는 신빙성 없는 소문이네. 누구도 그 아이에 대해 보고 들은 적이 없어.”
“당시 화재 이후 강제로 그만둬야 했던 관리인들 중 한 분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분에 따르면 매 끼니마다 차도현 외에 아이 한 명분의 식사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차준표가 그 아이의 식사를 챙겼는지 물었다는 것도 기억하더군요.”
“그 모든 게 사실이라고 해도 여전히 그토록 어린 도현 군이 그런 무시무시한 짓을 벌였다고는 믿을 수 없네. 대외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는 정말 곧고 선한 청년이네.”
“일을 저지른 건 차도현이 아닙니다. 그가 억누르고 있던 제2의 인격이죠. 제 추리가 맞다면 그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입니다. 그리고 박사님은 그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고요.”
‘사람이 머리가 너무 좋아도 탈이로군.’
석호필은 생각했다.

CHAPTER 9. 사실
(전략) “뭐라고요? 제가 집에 불을 지르고, 아버지를 죽이기까지 했다고요?”
도현은 정신이 혼미해지려 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의식의 끈을 놓치면 다시 신세기가 비집고 나올 수도 있다. 그는 최대한 호흡을 고르며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지워진 기억과 신세기가 자신에게 남겼던 말들. 자신은 진실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말.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다른 케이스가 그러하듯 그는 자신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순간 신세기라는 인격이 만들어져 그 고통을 대신 받아주었으리라는 것을, 자신의 인격은 마음속 깊이 숨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실현할 용기를 신세기에게 대신 떠넘긴 거라면? 그리고 자신은 깨끗하게 표백된 의식으로 착하고 따뜻한 척 살아온 거라면? 사실 차도현이라는 인격의 본모습은 신세기라면?
“오메가 군의 말은 가설에 불과하네. 자네가 그런 무서운 짓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석호필 박사는 도현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도현은 아버지의 사고에 대해 마치 도현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듯 분노하던 서태임 회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리 자신이 혼외 자식이라 해도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의 핏줄인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는 건 언제나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가보겠어요. 가서 진실을 물어볼 겁니다.” (후략)

CHAPTER 10. 진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오메가는 마음속 자책감을 몰아낼 수 없었다. 자신이 자신의 가설을 차도현에게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적어도 그가 진실을 찾겠다며 나갈 때 말리기라도 했더라면, 어땠을까. 끔찍한 교통사고였다. 도현의 차는 가드레일을 들이받았고, 그는 즉사했다. 차의 진행 방향을 봤을 때 그는 서태임 회장과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체 왜. 오메가는 이것이 우연한 사고라고 믿지 않았다. 충격적인 진실을 대면한 도현은 자기 안의 신세기, 어쩌면 자신의 실제 인격이나 다름없는 그를 없애고 속죄하는 유일한 방법이 자기 자신을 없애는 것이라 생각했던 건 아닐까. 그는 평생 자신의 치료를 갈망했지만 유일한 답은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었다.
“힐 미… 킬 미…”
오메가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것이 다음 소설의 제목이 될지도 모르겠다. 브으으응. 휴대전화의 진동음이 그를 다시 현실로 데려왔다. 번호, 그가 취재 및 수사를 위해 접촉했던 과거 승진그룹 저택의 관리인이었다.
“아 네, 어떤 일이세요.”
“하도 오래된 일이라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그 아이 있지 않습니까. 그 소문의 아이. 언젠가 준표 도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기의 식사는 챙겼냐고. 저는 그때 대체 얼마나 대단한 식사를 원해서 세기의 식사라는 표현을 썼나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아이의 이름이 세기는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성이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서 회장님께서 차 씨 성을 갖게 두셨겠습니까.”

CHAPTER 0-1. 진실 2
태임은 어제 저택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의 전모를 차근차근 머릿속에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겨우 7살 먹은 손자가 방화라는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 전부터 아이가 세기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분노를 드러냈지만 이런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방화로 인해 자신의 아들은 의식불명 상태가 됐고, 이 엄청난 일을 저지른 손자 차도현은,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은 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자 지하 창고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남편의 혼외자식 신세기다.
“큰일 날 뻔했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세기는 안 쓰던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 스스로를 페리 박이라고도 칭했다. 그룹 주치의는 극한의 상황에서 해리, 즉 정체성 분리가 벌어진 게 아닐까 의견을 내놨다. 태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감히 남편과 내연의 관계를 맺으며 그룹의 경영권까지 탐냈던 며느리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남편과 함께 처리할 때만 해도 이제 자신과 아들이 승진그룹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룹의 후계서열에서 차영표가 경영권에 한발 앞서게 된다. 세기가 차 회장의 아들이긴 하지만 자신은 이 더러운 치부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 아이, 사고로 인격이 분리된 거라면 새로운 인격도 만들어 덧씌울 수 있을까?”
“무슨 말씀이신지.”
“저 아이, 오늘부터 도현이야. 차도현. 우리 경영권 방어하려면 이 길밖에 없어. 신화란에게는 내가 얘기해둘게. 걔 돈 보고 우리 준표한테 접근한 애야. 자기 입지 생각하면 거부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해리성 장애가 생겼다고 해도 최고의 전문가가 아니면 새로운 인격을 덧씌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를 불러. 미국에 있는 석호필.”

글. 위근우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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