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기둥들│② 남명렬 “연기는 늘 새롭게 태어나야 해요”

2014.12.02
학자, 교수, 의사, 판사 그리고 스승. 매체를 가리지 않고 남명렬이 맡는 대부분의 역은 늘 그렇다. 2014년 12월에도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이하 <트라이브스>)에서는 가족에게 꼬장꼬장한 학술비평가로, tvN <미생>에서는 장그래에게 중요한 시기마다 가르침을 주는 바둑 사범으로 등장한다. 단호한 표정과 단정한 자세가 주는 외형적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정확히는 또렷한 발성과 임팩트 있는 강약 조절, 귀에 쏙쏙 박히는 대사 전달력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도 언어의 힘을 믿는 남명렬을 만났다.


이번 연극에서도 언어를 중시하는 인물을 맡으셨습니다.
남명렬
: 크리스토퍼는 지식인이지만 먹물이 쓸 것 같은 용어와 아주 강한 욕설이 혼재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자부심이 굉장히 크고 자기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적어도 가족 안에서는 군림하고 있는 사람이란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다 풀어내는 사람입니다. 난 지금까지 무대 위에서 이런 배역을 해본 적이 별로 없어요. 또 다른 형태의 연기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소통이 잘 되지 않는 가족 이야기를 기존에 봤던 희곡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죠. 수화가 나오는 연극이 또 다른 언어로의 소통 같다는 새로움도 느껴졌고요.

무대 위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니 후련하신가요. (웃음)
남명렬
: 며칠 전 분장실에서 배우들하고 그런 얘기를 했어요. “나는 이 연극을 하면서 배역에 대한, 연극에 대한 스트레스가 하나도 없어. 이상하지?” 생각해보니까 이 사람은 무대 위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는 데다, 본인이 가진 스트레스를 나머지 다섯 명한테 다 나눠줘 버리고 끝나요. <에쿠우스> 다이사트 역을 했을 때는 배역이 나를 짓눌러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바다와 양산>이라는 작품에서도 병든 아내와 사는 남자였죠.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다 꺼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내를 모두 다 위로할 수도 없고. 보통 공연 끝날 때까지 내내 그 마음을 갖고 사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웃음)

기존과 다른 캐릭터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남명렬
: 어떤 작품을 하든지 인물에 접근하는 기본 방법은 공통적으로 같아요. 처음 작품을 대할 때 그 인물에 대해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 선입견을 갖고 리딩을 시작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에 대해서 자꾸 내 필터를 가지고 해석하게 된다고요. 그건 결코 좋지 않아요. 그래서 처음 리딩할 때는 문장 하나하나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더듬더듬 읽어요. 그렇게 리딩을 한 후 연출이 갖고 있는 생각, 다른 배역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자세히 듣죠.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이냐는 99.9% 대본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들이 대본의 어떤 부분에 힌트가 있는지를 찾아내려 애를 쓰죠. 그런데 <트라이브스>는 리딩 셋째 날 정도였던가? 조금씩 인물에 접근하는 와중에 나도 모르게 내가 평소 가족들과 생활할 때 있었던 것 중 하나가 툭 튀어나오더라고요. 평소 굉장히 분석적으로 탐구하는 편인데 이번 작품은 특이한 경우죠.

선입견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언제쯤 알게 되셨나요.
남명렬
: 모든 배우가 그래야 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어요. 열 명의 배우가 있으면 열 명의 방식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23년간 연기를 해오며 알게 된 건, 나 자신이 어떤 인물을 설정해서 접근하는 쪽에 그렇게 강점을 가진 배우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나는 내가 가진 본성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더 좋은 쪽으로 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다 보니 애초에 선입견이나 연기 플랜을 갖지 않고 천천히 접근해가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됐죠.

하지만 정치적 성향이라든가 성격적인 면에서 자신과 정반대의 상황에 처한 인물을 마주했을 때는 어떤가요.
남명렬
: 몇 년 전에 최인훈 선생이 쓴 <한스와 그레텔>에서 한스 보르헤르트라는 인물을 연기했어요. 픽션이지만 히틀러의 개인 부관 이야기였죠. 자 그러면, 내가 이 사람이 추종하고 있던 히틀러와 제3제국에 대한 것들을 좀 더 명확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연기를 해도 진심으로 안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의 투쟁>도 사다 읽어보고 히틀러에 대한 책들을 봤더니 진심으로 인물에 접근할 수 있었고, 거기에 더불어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죠. 2009년에는 <마라, 사드>에서도 이념적 취향으로 따진다면 저는 급진파 지도자 마라 쪽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사드 역을 했거든요. 그런 다양한 인물들이 이 안에 마치 먼지가 쌓이듯 어딘가에 쌓여 있을 겁니다. 먼지는 쌓이는 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느 시간이 지나면 이만큼 쌓여 있는 게 보이죠.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연극을 한다는 것은 점점 시야를 넓히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남명렬
: 소위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과거에 했던 방식에 대해 지루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그러니까 진보, 보수로 가른다면 진보 쪽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옛날하고 왜 똑같은 걸 해야 돼?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니 당연히 성향도 진보화되겠죠. 보수적 사고를 가진 예술가들은 과거를 답습하니까 자가 복제를 계속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점점 열성 인자만 더 드러나게 돼요. 늘 새롭게 태어나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시야가 넓어지기도 하지만 나이에 비해 사고 자체가 젊어지지 않나 싶어요.


연극은 인물에 천천히 접근해갈 수 있는 조건이 되지만, 드라마나 영화는 그런 시간적 여유도 서브텍스트를 찾을 만큼의 비중도 담보되지 않을 경우가 많습니다.
남명렬
: 쉽지 않죠. 물론 영화는 조금 다른 문제지만, 드라마의 경우 대본 분석 과정이 없을 수밖에 없어요. 처음에 설정했던 캐릭터가 나중에는 내가 달라지고 싶지 않아도 달라져 있을 때도 많죠. 저처럼 드라마를 하긴 하지만 대단한 분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일 경우 일단 내가 설정을 하고 현장에서 바로 구현해줘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촬영 자체가 어렵죠.

<미생>에선 비중과 상관없이 큰 존재감을 남기고 계시는데,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남명렬
: 한 10년도 넘게 전인 것 같은데, 김원석 감독과 단막 드라마를 같이한 적이 있어요. 그 이후로 연락이 없다가 KBS <성균관 스캔들> 때 연락을 받았죠. 김승헌이라는 인물이 계속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막판에 등장할 때가 됐어요. 어떤 분이 나와야 할까 부담스러워 했던 것 같애. 드디어 등장했는데 에? 뭐야? 이러면 안 되잖아. 그때 퍼뜩 내 생각이 났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2회 정도 특별출연을 했고, 그 인연이 이렇게 이어졌죠. 근데 이 양반은 특별한 배역이 있을 때 내가 생각이 나나 봐. (웃음) 김원석 감독은 디테일이 좋아서 한 회 특별출연이면 어떠냐 좋은 사람과 작품 하는 게 좋은 거지, 해서 흔쾌히 하게 됐죠.

주로 앉아서 대사를 하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웃음) 고수의 아우라가 풍기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남명렬
: 내가 지금까지 코미디를 딱 한 작품 했어요. <누가 누구?>라는 작품인데, 그게 대단히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연극을 계속 해보니 굉장히 성공적인 작품이 개인인 나를 성장시키냐 하면 꼭 그러지는 않더란 말이죠. 그 작품 전까지는 ‘문장 하나도 단어 하나도 의미 없는 대사가 없어!’라는 생각에 대사 한마디 하는 것이 마치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대사에 모든 걸 담았어요. 하지만 코미디는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내면에 이런 걸 가지고 있어야 돼! 라고 하면 이미 늦어버리는 거야. 그것을 끝내고 내면에 쌓인 것이 있다면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향기처럼 저절로 흘러나오게 된다는 걸 알게 됐죠. 그 작품 하기 전에는 “그래 그 친구 썩 괜찮은 배우야”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런데 왠지 여유가 없어 보이지 않아?” 이런 평가를 받았어요. 다 그런 이유에서였겠죠. <누가 누구?>를 한 후에는 나도 모르게 무대 위에서 저절로 여유가 찾아지고,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됐어요. 축구선수도 90분 내내 최선을 다해서 뛰어다니지 않아요. 그럼 효율적이지도 않고 기량을 발휘할 수도 없어요. 모든 선수가 박지성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메시라는 축구선수가 있잖아요. 메시가 축구 하는 걸 보면 어느 부분에서는 설렁설렁 다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자기가 필요한 순간에는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집중력과 에너지를 발휘해서 간다고요. 그래서 골을 많이 넣는 거야.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어떤 분위기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서른셋까지 직장생활을 하다가 연기를 시작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꾸준히 이 작업을 할 수 있었던 동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남명렬
: 외부적 동력과 내부적 동력이 있을 수 있겠죠. 내부적으로 본다면 어린애도 그렇고 나이 든 사람도 그렇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잘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내 마음이 기뻐요. (웃음)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언변이 좀 좋아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얘기할 때 “너 진짜 말 잘한다” 얘기 들으면 기쁘다고. 그럼 자꾸 말을 하고 싶어지고.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결국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자꾸 확인시켜주는 일인 거거든요. 다 칭찬받는 일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것이 내부적 동력일 거예요. 그리고 외부적 동력을 얘기하면 공연을 자꾸 해야지 인컴이 생기고. 예술가이면서도 생활인이기 때문에. (웃음)

23년 연기 인생 동안 슬럼프를 경험한 적은 있으신가요.
남명렬
: 배역이 잘 안 풀린다거나 구성원들과 의견이 잘 안 맞는다거나 여러 가지 때문에 괴로울 때도 있죠.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그런 것조차 나를 살아 있게 하고 기쁘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예요. 나를 괴롭게 한다면 그 큰 괴로움 때문에 작은 기쁨이 더 돋보일 수도 있거든요. 기쁨과 괴로움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연극을 하면서 괴로웠던 순간들이 결국 기쁨을 주는 것이었다, 라고 얘기할 수 있겠네요. 전 지금 연극도, 드라마도, 영화도 하고 그 외에 음악회도 하고 때때로 행사에서 사회도 보고 하지만 혼자 스케줄 짜고 운전하고 다녀요.

워낙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데, 그중 2011년에 하셨던 EBS <문명과 수학>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남명렬
: 지금까지 TV 영상물을 여러 개 했지만 저의 대표작을 꼽으라 하면 저는 그 작품을 꼭 말하고 싶어요. 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같이 일했던 모든 구성원들이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좋은 작품을 뽑아냈어요. 그리고 나의 쓸데없는 호기심이 좋은 영상을 많이 만들어내기도 했어요. (웃음) 피라미드에 갔는데 저기 조금만 올라가서 보면 이 사막이 어떻게 보일까가 궁금해져서 올라갔어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있던 절벽에 서 있는 장면도 중간에 뾰족 튀어나온 곳이 궁금해서 보다가 카메라맨이 그 장면을 캐치해서 찍어냈죠. 호기심도 많고 어릴 때 산 중턱에 살아서 맨날 산 타고 나무 올라가면서 놀았던 게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대사 전달력이 선생님의 장점으로 부각되면서 내레이션이나 EBS 라디오 <고전읽기> 진행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선생님의 작품은 귀가 호강한다는 느낌이 있어요.
남명렬
: 그 부분도 분석과 연결이 많이 되어 있어요. 분석을 한다는 건 내가 이 말을 하는 의지가 무엇이냐가 참 중요하거든요. 말을 하는 의지가 있으면 의지가 담긴 곳에 방점이 찍히게 되어 있어요. 말을 할 때 가장 적확한 심정을 내가 가져야 한다는 거지. 그걸 가지려고 부단히도 애쓴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건 이호재 선생을 벤치마킹한 거거든요. 이호재 선생 대사를 듣고 있으면 그 양반이 얘기하는 전체적인 이야기가 내가 일부러 들으려 하지 않아도 귀에 쏙쏙 들어와요. 그래서 그 사람을 연구했지. 그냥 보통 얘기할 때는 설렁설렁 하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툭 치고 나가더라고. 내가 화났다고 해서 화난 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쏟아내면 감정만 보이지 왜 화났는지가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쭉 가다가 감정은 나중에 어미에서만 쳐주면 되거든요. 일상 속 모든 대화에서의 연습으로 그동안 체득된 어떤 대사법이 상당히 일조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거는 이호재 선생을 연구한 결과입니다. 허허허. 나도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다음에 그 양반하고 공연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 저분은 배울 게 많은 분이구나 생각했어요.

어떤 지점에서 가장 자극을 받으셨나요. (웃음)
남명렬
: 아유, 저는 분석해서 배우지만 그 양반은 태생적으로 저절로 돼.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 양반이야 부러운 거 투성이죠. 나는 열~심히 해야 그 양반 발가락 하나 붙잡을 것 같아요. (웃음)

글. 장경진
사진. 이진혁(스튜디오 핑퐁)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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