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사랑이 한 일

2014.10.24

읽기의 개인사에서 영화에 대한 글은 자주 좌절감을 불러일으켰다. 언젠가 장정일이 쓴 것처럼 ‘나는 왜 저걸 보지 못했는가’ 싶을 때가 첫 번째, 영화보다 그 해설이 더 감흥이 컸을 때가 두 번째다. 사실 오랫동안 내가 좋아했던 영화들은 몇몇 평자들의 눈을 빌려 명쾌하게 글로 번역된 후에야 내게 진정으로 걸어 들어온 셈이었으며 이 습관의 원형은 아직까지 여러 장르의 예술 감상에서 남아있다. 이런 고백에서 혀를 차도 좋지만 불감증보다는 차라리 진단에 대한 갈망이라 해 준다면 좋겠다. 내게 발생한 막연한 감각을 다른 이의 설명을 통해 맥락과 이유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한참 잊고 지냈던, 영화를 읽어낼 때의 쾌감과 그보다 더 큰 좌절감을 상기시키는 책이다. 문학평론가로서 영화의 서사만을 탐구했다는 이 책의 전략이자 개성에 아쉬움을 제기할 수는 있어도 그 아래 놓인 글에 있어서는 이 이상 정합성과 심미성을 갖추며 쓸 수 있을지 의문을 품기 어렵다. 영화가 삶과 세계에 대해 미학적인 답변을 꿈꾼다면 그 꿈의 성패에 대해 정확하게 쓰려는 것이 비평가의 꿈일 텐데, 이런 세계에서는 어느 것도 완전한 정답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튼튼한 이론과 치밀한 의미망에 발을 딛고 계측 불가능한 세계의 성취를 설득해 내는, 그러면서도 표정이 풍부한 신형철의 글은 틀림없이 근사(近似)하다. 좋은 해석은 깊은 인식을 생산하고 그것이 거꾸로 대상 작품을 심오한 것이 되게 한다고 신형철은 첫 장에 다짐처럼 썼는데 이 책이 곧 그 성취의 모범이 됐다. <아무르>는, <더 헌트>는, <라이프 오브 파이>는 그가 다시 씀으로써 더 깊어졌다.

하지만 이 책은 나아가 특별하다. 설득력을 넘어 특별해지는 이유라면 사랑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서사의 주된 소재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텍스트 해석자의 자세이자 동력으로서의 사랑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라는 작품들의 목소리에 응답하려는 의지로 가동된 책이다. “조금도 애정을 느낄 수 없는 텍스트였다면, 대체로 그래왔듯이, 아무것도 쓰지 않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워낙에 그에게선 사랑 없이 쓰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예술에 열광하는 것은 비평가와는 무관하다”는 벤야민의 말과 ‘애정이나 감동을 비평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평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말을 동시에 감당하고 싶다면서도 후자 쪽에 설 때가 더 행복했다고 한 것이 첫 번째 평론집부터의 고백이었다.

그런데 분석 대상을 향한 사랑이라는 문제는, 문학평론가로서의 그의 역사와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에서 감독이 애초에 하려고 하지 않은 일을 왜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은 무익하고 또 재미없는 일이라는 문장을 몇 번 만났는데, 거기서 그에게 종종 향했던 ‘당신은 왜 비판하지 않는가’라는 질타와 그때마다 그가 내놓은 짧고 분명한 입장들을 떠올렸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어쩌면 이번 책은 스스로의 비평 방법에 대한 우회적인 주장도 되고 만 게 아닐까. 해석에 대해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이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비판/옹호라는 이분법의 부실함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평론의 동력으로 삼는 사랑을 달리 말하면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고수하기’라 부를 만한 태도다. 어떻게든 작품의 장점을 찾아내 끝내 ‘강추’하고야 만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이야기를, 그 속의 인물들을 쉽게 도덕적으로 기소하거나 짧은 단어로 몰아붙일 수 없다는 원칙 같은 것이다. 예컨대 ‘롤리타콤플렉스’라는 말은 <롤리타>를 읽지 않아도 된다고 믿게 만드는 유죄추정의 방편인데, 작품을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말을 버릴 수 있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이런 사랑의 방법은 어떤 야망을 포기하는 대신 인간이 어디까지 섬세해질 수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리는 다른 야망을 선택하게 한다. 그는 <몰락의 에티카>에서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해 야망이 많지 않다고 적은 바 있다. 이를 ‘정확한’이 내포하는 표적의 특정성과 결부시켜 개별적인 것을 개별적인 것으로서 온전히 건져 올리는 일이라 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이렇게도 썼다. ‘<테이크 셸터>는 금융 대란 이후 중산층의 위기와 병적인 불안을 보여준다’는 식의 진술은 틀리지는 않았지만 이 텍스트를 너무 성급하게 보편성의 좌표 위로 배치하는 행위이며, 그 이전에 “그 텍스트를 세상에서 하나뿐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해석)”이 충분히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게다가 훌륭한 이야기들이 대체로 인간의 불행을 다룬다는 필연 때문에 비평가들은 타인의 불행에 대해 왈가왈부해야 하는 난감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 거기서 용서받을 수 있는 드문 길은 “그 불행이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래서 쉽게 분류되어 잊히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이라고.

그의 사랑법은 여기서 해석의 윤리학과 만난다. “왜 그가 히스테리에 걸릴 수밖에 없었는지 집요하게 경청해 이해한 다음 그 사람 자신에게도 납득시켜요. 정해진 규범에 증상을 끼워 넣는 게 아니라 매 증상이 규범이 되죠.” 과거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비평의 틀로서 정신분석학에 매료되었던 이유도 맥을 같이 한다. 이 말을 그의 글쓰기에 대해서 되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해석한 사례 하나하나가 삶의 고유한 문제가 되며, 그의 사랑법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관객으로서 혹은 제각각의 원본으로서 이 불행들에 관여하는 우리가 그것들을 자문하게 된다면 읽기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사건’의 발생일 테고, 그렇다면 이건 그의 사랑이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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