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추석에 당신에게 생길 일

2014.09.05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한 추석 연휴의 며칠에 관한 이야기를 <아이즈>에서 준비했다. 실화다.


“아. 집인가.” 핸드폰의 알람 소리에 눈을 뜨니 익숙한 허연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추석 동안 시골집에 며칠 있었더니 서울 자취방이 조금 낯설어진 것 같았다. 천장도, 덮고 있는 이불의 촉감도, 왠지 모를 피부의 느낌도. 추석 내내 이곳저곳 다니느라 피곤해진 몸에 그런 차이는 아무 상관 없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어딘가 간지러웠다. 조금 더 정신을 차려보니 허벅지 어딘가. 그사이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5분마다 다시 울리는 알람이 다시 울렸다. 아, 오늘 출근을 해야 했었나. 출근 저주에 걸린 좀비처럼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허물 벗듯 벗겨낸 물렁한 몸에 물을 맞으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그때였다. 허벅지에 혈관처럼 갈라진 붉은 자국을 본 것은. 대체 뭐였지. 모기에 물린 것치곤 살이 부푼 것도 아닌데. NGC의 다큐멘터리에서였나. 화산재와 용암이 팝콘처럼 튕겨져 나가는 화산 분화구. 그곳에서는 산을 녹여버릴 듯한 용암이 흘러나왔는데, 꼭 그것 같았다. 꾸물꾸물대며 흘러나오는 허벅지의 시뻘건 줄기들. 그리고 간지러움. 대체 내 몸에 누가 무슨 짓을 한 건가. 기억을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 고속버스
집으로 내려갈 표를 일찌감치 예약했다. 몇 시간 뒤에는 집에 도착한다. 우등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어서, 좀 막히긴 하겠지만 상관없었다. 출발도 일찍 한 편이고, 어차피 막히는 길이다. 가방에 목베개를 넣어왔고, 여분의 핸드폰 배터리도 챙겼다. 물론 태블릿도. 볼 만한 웹툰 리스트도 만들어놨고, 그동안 챙겨 듣지 못했던 팟캐스트도 저장해놓았다. 긴 시간 동안 배가 고파질 수도 있으니 사이다(150kcal)와 망에 담긴 삶은 계란 3개(개당 80kcal)도 준비했다.

“15분 정차입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휴게소였다. 감자 버터구이(300kcal)와 호두과자(615kcal/개당 41kcal)를 집어 들고 곧 버스를 탔다. 챙겨둔 ‘미드’는 볼 만큼 봤고, <마음의 소리>를 역주행하며 낄낄거렸다. 이어폰에는 팟캐스트 <크로스카운터>에서 패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전 사람들은 고칼로리가 고영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예상대로 귀향길은 꽉 막히기 시작했고, 태블릿을 계속 들여다보니 눈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작게 음악을 틀어놓은 채 눈을 감았다. 예전에는 어떻게 이 시간을 견뎠나 몰라, 하는 생각과 함께 슬슬 잠이 들었다. 집에 도착한 것은 그러고도 휴게소를 한 번 더 들른 뒤였다. 오랜 시간 차에 앉아 있다 보니 다시 배가 고파져서 떡볶이(280kcal)와 충무김밥(490kcal), 옥수수버터구이(230kcal)를 먹었다. 이미 날은 저물었고, 집에 도착하자 엄마가 나를 가장 반겨주셨다. 엄마는 우리 딸이 왔다며 잡곡밥(325kcal)에 돼지고기 김치찜(174kcal)을 먹으라고 하셨다. 이제야 집에 온 느낌이다.

# 전을 부치고 파스를 붙이고
“그만 일어나서 아침밥 먹어!” 저 멀리서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아침은 잡곡밥(325kcal)과 된장찌개(124kcal), 어제 먹다 남은 김치찜(174kcal)이었다. 엄마는 늘 그랬듯 나에게만 콩을 많이 줬지만, 예나 지금이나 “다 먹어”라는 말만 반복하셨다.

식사를 마친 뒤, 본격적인 명절 일정이 시작됐다.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할머니 집에 납치되듯 끌려갔고, 할머니 집 주방에서 드디어 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전은 부쳐도 부쳐도 재료가 바닥나지 않았고, 전을 뒤집을 때마다 올라오는 기름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분명히 새로 뜯은 기름을 썼던 것 같은데, 그건 다 어디로 간 건지. 엄마는 몇 번이고 “딸, 기름 좀 사와라”라며 심부름을 시켰다. 가지런히 꽂힌 산적과 호박, 배추들이 계란 옷을 입고 전기 프라이팬에 부쳐졌다. 전이 부쳐질 때마다 엄마와 나는 간이 맞는지 몇 개씩 시식을 해야 했다. 막 익힌 동태전(783kcal/개당 87kcal)은 한 입 물자 노란 겉옷 사이에서 하얀 살결이 갈라졌고, 김이 나는 살에는 윤기가 흘렀다. 전을 부치다 지쳐 일단 준비한 음식 중 조금씩 덜어 점심을 먹었다. 상에는 쌀밥(300kcal)과 갈비찜(531kcal), 조기찜(515kcal), 잡채(191kcal), 게장(637kcal), 김치(29kcal)가 올라왔다. 이렇게 많은데도 아직 해야 할 음식이 한참 남았다니. 하지만 먹어보니 역시 맛있다. 좀 기름지긴 하지만.

길고 긴 음식 준비는 전을 부치고 나서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 삼색 나물과 튀김, 토란국까지 다 준비한 후에야 겨우 끝났다. 엄마는 나에게 파스를 붙여달라고 했다. 왜 명절은 쉬지 않고 음식만 준비하다 하루가 가야 하는지. 추석 때마다 엄마에게 음식 좀 줄이자고 했지만, 손이 큰 엄마는 작년과 똑같이 “친척들까지 먹으려면 넉넉하게 준비해야지”라고 말했다. 아니 그럼 그 친척들도 와서 좀 하면 되잖아. 하지만 엄마는 내년에도 나를 붙잡고 같이 전을 부치시겠지. 어쨌든 저녁에 친척들이 왔고, 그나마 가까운 또래 사촌들과 만났다. 수다를 떨다 할 일도 없어 맥주(236kcal/500cc 기준)나 하자며 어슬렁어슬렁 동네를 나갔다. 치킨(380kcal/1인분 기준)을 안주 삼아 마셨다.

# 차례상, 천하장사 만만세, 고스톱
드디어 하이라이트가 돌아왔다. 조부모님의 세 아들과 그 가족들이 오자 집이 꽉 찼다. 어제 내내 준비한 음식들이 차례상 위에 올랐다. 음복 후 제사상에 올라간 삼색 나물과 각종 나물을 넣어 고추장에 슥슥 비벼 비빔밥(599kcal)을 만들어 토란국과 함께 먹었다. 아침부터 이렇게 먹으니 배가 왠지 불편했다. 하지만 모든 친척들이 다 모이는 자리에 빠질 수도 없다. 그리고 명절 때만 얼굴을 보는 친척 어르신들과 얘기하는 것보다는 열심히 먹는 게 편하기도 하다. 밥을 먹고 아무래도 배가 꺼지지 않아 식혜(200kcal/100ml당 100kcal)를 방으로 들고 가서 먹었다. 다행히 느끼한 게 좀 가라앉았다. 점심때까지는 방에서 <왕좌의 게임>이나 마저 보면서 버텨야겠다. 심심하다.

점심시간이 되자 할머니는 고봉밥(300kcal)과 토란국(64kcal)을 직접 퍼주셨다. 사실 추석에 고향에 온다는 건 이 순간을 위해서다.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손녀 노릇이겠지. 그리고 어쨌건 명절 음식은 먹을 만하다. 어제 만들어놓은 갈비찜(531kcal)과 조기찜(515kcal), 잡채(191kcal)와 여러 전(호박전(140kcal/개당 35kcal), 동태전(435kcal/개당 87kcal), 꼬치전(372kcal/개당 186kcal), 동그랑땡(135kcal/개당 45kcal), 배추전(195kcal)들이 다 올라왔다. 식사를 다 하면서 사실상의 추석 일정은 끝났다. 이제 조금씩 쉬면서 올라갈 채비를 하면 된다. 집에 가서 하루라도 쉴 생각을 하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TV에는 늘 그렇듯이 외국인들이 한국에 시집와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외국인들의 이야기가 끝난 뒤 천하장사 씨름대회가 시작할 즈음, 작은 엄마가 드디어 고스톱을 치자고 했다. 어른들이 자리를 깔았고, 나는 대부분 광을 팔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차례까지 지내서 잠을 더 자고 싶었지만, 엄마의 눈치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고, 짬짬이 먹는 사과(반개 70kcal)와 배(반개 70kcal), 그리고 곶감(100kcal/개당 50kcal)과 약과(172kcal)는 맛있었다. 엄마는 “얘가 입이 짧다”며 내게 계속 뭔가 먹으라고 했다.

# 결혼하고 애 낳고 공부시키고 대학 보내고 결혼시켜야지
본가 친척들이 모두 돌아간 뒤, 이제는 외가에 갈 차례였다. 쌀밥(300kcal)에 된장찌개(124kcal)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점심때 외가에 들렀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그렇듯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리 애기 언제 결혼하니” 같은 말만 안 하셨다면 더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애는 언제 낳을 거냐”라는 말을 하셨다. 하긴, 한두 해도 아니고 이제는 각오하고 있는 일이다. 어차피 내가 결혼하고 애를 낳으면 “애는 공부는 잘하냐”고 물어보시겠지. 그래도 늘 나를 사랑해주시는 외할머니니까 조용히 밥을 먹고 돌아가자. 외가의 점심에는 갈비찜과 잡채, 전 같은 추석 기본 세트 말고도 홍어무침(91kcal)과 꼬막(482kcal/100g당 241kcal)이 있었다. 외가에서만 먹을 수 있는 꼬막은 정말 탱글탱글했다. 그 쫄깃한 맛에 밥을 먹고 외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몇 개 더 집어 먹었다.

# 수수께끼는 풀려봤자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알았다. 나는 살이 튼 것이었다. 3일 동안 내가 먹은 칼로리는 대략 11,955kcal. 20~30대의 하루 권장 칼로리는 2,300~2,500kcal이다. 나보고 입이 짧다고 하던 엄마는 수화기 속에서 “간지러울 때 로션 많이 발라주고. 작작 먹고. 아이고”라고 소리치셨다. 문득 엄마 배에 새겨진 하얀 자국들, 중학교 시절 막 발육이 시작되었을 때 가슴살이 터졌다는 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엄마는 생명의 탄생을 몸에 새겼고, 내 친구는 성장이란 고통을 몸에 새겼다. 그럼 나의 터진 살은 무엇을 새긴 거지? “예전 사람들은 고칼로리가 고영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하던 팟캐스트, 엄마의 “작작 먹고”가 양 귀에 번갈아 들려왔다. 내 살처럼 활화산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터지는 소리도 들렸던 것 같다. 그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화산은 붉은 용암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연기 속에는 악마가 날 비웃고 있었다.

교정. 김영진




목록

SPECIAL

image '놀면 뭐하니?' 효리X비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