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기르다>, 삶을 배우다

2014.09.05

일로 알게 된 40대 기혼 여성과 맥주잔을 기울인 적이 있다. 단 두 번째 만남인 탓에 다소 어색한 대화를 나누다 그분과 남편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 화제에 올랐다. 나는 생각해본 적 없는 일에 대한 말들이 늘 그렇듯 어디서 주워들은 풍문과 당신의 고통을 알 것 같다는 식의 태도를 적절히 내두르고 “그런데 아이 기르는 게 또 얼마나 힘들어요”라고 말했다. 이윽고 돌아온 그녀의 말은 아직까지 잘 잊히지 않는다. “네, 그런데요. 구체를 견디는 것과 추상을 견디는 것은 다른 것 같아요.”

예컨대 누군가와 헤어진다거나 병을 얻었다거나 친구와 싸웠다거나 하는, 의도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구체적인 일들이 있고, 그것을 체험함으로써 삶이라는 감각은 발생한다. 이와 달리 ‘그것이 일어났다면’, ‘그것을 겪었더라면’이라는 가정과 유추 속에만 존재하는 일들이 있는데, 어쩌면 그 실체가 없는 영역이야말로 우리가 견디고 있는 주요한 삶의 요소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무신경함을 깨달은 그 대화에서 그녀의 말을 헤아려보자면 그랬다.

옴니버스 단편집 <개를 기르다>(다니구치 지로)의 주인공인 부부에게도 아이가 없다. 왜 아이를 갖지 않았는지(혹은 못했는지)는 언급되지 않고 다만 그 구체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어떤 말, 표정, 상황만 무덤덤하게 등장할 뿐이다. 그리고 15년간 부부와 함께 한 개 탐의 죽음, 머지않아 우연한 계기로 고양이 보로를 들이게 된 사연과 보로의 출산, 이웃집 눈먼 개 마루의 실종 사건, 가출해서 무작정 찾아온 조카 아키코와 보낸 짧고 떠들썩한 여름. 이 네 개의 이야기엔 그들이 견디는 ‘없음’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역으로 말해, 그림자는 구체적인 실체가 있기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개와 고양이가, 갑자기 등장한 조카가 아이의 대체물이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이 만화가 누군가가 겪는 구체적 경험들로부터 그들이 ‘겪을 수 없었던’ 것까지 드러냄으로써 삶을 총체적으로 묘사한 훌륭한 서사적 시도로 읽혔노라고 말하고 싶다.

<개를 기르다>는 한때 활기찼을 시간을 생략한 채, 책을 열자마자 이미 볼품없이 늙어 있는 개의 모습을 비춘다. “탐이 버티는 모습이 너무 고통스러워 더욱 괴롭고 슬프다. 이런 생각을 하며 탐을 간호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15년 전 개도 부부도 젊었을 적엔 이런 시간이 닥치리라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 ‘그러니까 개를 기르지 말았어야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이를 낳았어야지’라는 말만큼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만화는 무얼 선택했고 무얼 선택하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끝내 나의 경로와 교차점을 만들고야 만 어떤 타자에게 책임을 지는 일의 연쇄가 곧 삶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늙은 잡종견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그것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려는 반려인의 모습, 거기서 흐느끼듯 조용히 흘러나오는 온갖 감정을 통해 우리는 삶의 윤곽선을 직감하게 된다. 책임. 부부가 개를 돌본 만큼, 개는 그들을 살아 있게 한 것이다.

<개를 기르다>는 맨 끝에 다른 이야기 하나를 배치한다. 독립된 단편 ‘약속의 땅’은 언제고 죽음으로 미끄러질 수 있는 고산의 세계에서 따뜻한 가정이 있는 평범한 세계로 돌아온 남자의 이야기다. 그러나 직장과 가장으로서의 책임에 묶여 ‘산을 끊었다’고 마음먹은 그의 앞에, 마지막으로 도전했던 안나푸르나에서 본 눈표범의 환각이 자꾸만 나타난다. 남자는 강하게 흔들린다. 놀랍게도 누구보다 그가 산에 가지 않길 바라는 아내가 등을 떠민다. 남편이 평생 추상을 견디는 모습을 보는 대신, 그녀 자신이 구체를 견디기로 결정한 게 아닐까. 결국 남자가 안나푸르나의 정상을 밟고, 다시 눈표범과 조우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만일 남자가 무사히 산을 내려가게 된다면, 그를 지탱하는 생명줄은 저 평지의 세계에서 내뿜는 중력, 즉 가족의 간절한 바람과 남자가 끝까지 지려 하는 책임일 것이다.

안은별 (전 <프레시안> 기자)
탈락한 입사 지원서가 ‘패자 부활’하여 기자가 되었고, 사표가 반려되어 특수 부서로 배속된 결과 4년간 북 리뷰 섹션을 만들면서 책 세계와 연을 맺었다. 현재 다른 길을 도모하면서도, 꾸준히 책을 읽거나 쓰고 옮긴다.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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