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는 정말 조선을 바꿀 리더였나

2014.08.29

병자호란의 패배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고, 아버지 인조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떠도는 왕세자. 소현세자의 인생은 문자 그대로 드라마틱했고, 그만큼 많은 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KBS <최강칠우>와 <추노>는 모두 인조를 악역으로, 소현세자를 도탄에 빠질 조선을 구할 성군이 될 인물로 묘사했다. 최근 방영하는 tvN <삼총사>에서는 소현세자(이진욱)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소현세자에 대한 아쉬움을 더욱 강하게 내비친다. 정말로 소현세자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패전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개혁할 인물이었을까.

소현세자를 다루는 작품들에서는 그를 명민하고 인정이 많은 인물로 소개하곤 하는데, 덕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1637년 <소현심양일기>에는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이후 청으로 끌려가면서 지나치는 촌가의 백성들에게 “마을 사람 1백여 명이 병화를 피해 석굴에 숨었는데, 세자가 쌀 몇 말을 나누어 주었다”고 적혀 있다. 일기 곳곳에는 이런 일화들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함께 지낸 신하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건강을 챙겼다 한다. 소현세자가 삼전도에서 왕이 직접 머리를 조아리고 이마를 땅에 찧는 항복 예식을 치를 때 눈물을 참지 못한 것은 그의 성품을 보여준다. <인조실록>은 “이때 세자가 상(인조)의 곁에 있다가 울음을 터트리자 상이 달래었다”고 기록한다. 백성에게 베푸는 것을 아끼지 않고, 주변 사람을 두루 챙겼으며, 아버지의 치욕에 울음을 참지 못하는 심성을 가졌으니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드라마 속 소현세자의 모습은 이런 성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소현세자는 드라마 속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언제나 멋진 모습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여러 드라마에서 소현세자는 매우 영민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삼총사>에서는 자신과 친구들을 ‘삼총사’라고 부를 만큼 말과 무술에 뛰어나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정묘호란으로 인해 2개월간 분조(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로 전주로 내려가는 길에 적힌 <소현분조일기>에 따르면, 그는 말을 잘 타지 못했다. 신하들은 당시 15세였던 세자에게 “저하께서는 말을 타는 것도 익숙하지 않으신데, 지금 말 달리기를 연일 계속하시면 필시 몸을 상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청한다. 또한 훗날 청나라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했을 때는 조선의 외교관 역할도 맡아 황제의 사냥에 종종 참여했는데, <엽행일기>에 따르면 말을 잘 못 타 낙마하고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하루 60~70리씩 달리며 사냥하는 일정을 힘들어했고, 사냥에서 돌아온 뒤 질병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있다. 소현세자가 볼모로 심양 관소인에 머물 당시, 그는 스트레스로 소화불량, 안질, 기가 막힘, 마비 증세, 불안 증세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진다.

몸이 허약한 편이니 공부도 그리 쉽게 되지 않았다. 1625년, 소현세자 나이 13살부터 시작하는 <동궁일기>를 보면 ‘서연(조선시대 왕세자를 위한 교육 제도)을 쉬었다’는 말이 매우 자주 등장한다. 세자는 당대 최고 지식인 집단과 논술시험격인 회강례를 치르는데, 이 자리에서 꾸중을 듣는 경우가 잦았다. 성적도 수우미양가에 해당하는 순통략조불 5등급에서 순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세자는 9년간 <통감절요>를 594회나 공부했는데, 통감절요를 이처럼 오래 공부할 정도면 학습능력이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삼총사>에서 소현세자가 기지가 출중한 인물로 그려지고, 다른 작품들에서도 모든 이의 존경을 받는 뛰어난 지도자로 묘사되는 것은 허구가 아니다. 무예에 능하지 못하고 공부를 잘 못 했을지라도, 그는 뛰어난 정치인의 싹을 보여주고 있었다. 1637년부터 청나라 관소인에 머물렀던 소현세자는 200여 명의 인원을 책임져야 했다. 청나라와 조선에서 경비를 일정 부분 지급하기는 했지만 돈은 항상 부족했다. 반면 청나라는 유목민이어서 돈은 있었지만 농작물을 비롯한 생필품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한인 노예들과 소를 사서 농사를 지었고, <심양장계>에 따르면 1642년 농사로 3,319석이나 곡식을 수확했다. 인질 생활로 고통받는 조선인들로 가득 찼던 심양관 앞거리는 강빈의 경영 수완 덕에 장사를 하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인조실록>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고 기록할 정도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기지와 능력은 오히려 인조의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았다. 조선에서 장사는 중인계급이 하는 것이었고, 오랑캐와 거래를 하는 것 역시 인조에게는 마땅치 않았다. 그 와중에 소현세자가 조선에 돈을 더 보내 달라 요청하자, 인조는 소현세자가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입지는 인조의 의심에 불을 질렀다. <심양일기>에 따르면 조선에서 청으로 조공을 보냈을 때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소현세자를 불러 책망했다. 심지어 조선에서 들여온 생강이 얼었거나 세폐미가 썩은 경우에도 소현세자를 힐난했다. 그만큼 소현세자를 외교적 창구로 삼았고, 때로는 재량권을 주고 일을 처리하기를 원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요청에 자신은 정사에 관여할 수 없다며 막아내고, 청나라에 조선의 어려운 실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청나라가 요구하는 군수물자의 수량과 기간을 조선에 유리하도록 설득하는가 하면, 파병 지원군의 숫자도 1만 명에서 5천 명으로 줄이기도 했다. <삼총사>를 비롯한 작품들에서 소현세자가 조선을 바꿀 군주로 묘사되는 근본적인 이유다. 그는 드라마처럼 무예에 뛰어나지는 않았을지라도, 청과 조선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며 조선을 최대한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믿을수록 오히려 조선에서 그의 입지는 불안해졌고,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왔을 당시 이미 인조와의 사이는 틀어졌다. 인조의 독살설이 돌았던 이유다. 서른넷의 젊은 나이에 급사하기도 했지만, <인조실록>에 ‘온몸이 새까맣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와 (중략)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고 기록된 것은 이런 의혹을 더 강하게 키웠다. 다만 소현세자의 일기로 추정하면 그의 사인은 학질로 추정된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강빈 역시 인조의 독살 시도에 대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소현세자가 왕이 됐다 하더라도 조선이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인조는 자신에게 굴욕을 선사한 청나라와 좋은 관계로 돌아설 수 없었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그가 청을 통해 받아들인 새로운 문물에 대해 적은 일기는 모두 소멸됐다. 소현세자가 왕이 됐더라도,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수립한 당시 조선의 권력자들이 소현세자의 뜻을 받아들였을지는 미지수다. 당시 조선은 소현세자가 추구하는 정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상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볼모 시절에도 기지를 발휘해 청나라의 신임을 얻고, 그럼에도 언제나 조선을 위해 일했던 세자. 그가 왕이 됐다면 조선은 좀 더 좋은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기대. 이 안타까움으로부터 <삼총사>처럼 소현세자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꾸준히 만들어진다. 그만큼 대중이 현재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일까. 속단할 수는 없다. 그저 지금의 현실에서는 그런 안타까움이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참고 도서
<역주 소현동궁일기> 한국학연구원 동궁일기역주팀 (민속원)
<역주 소현분조일기> 한국학연구원 동궁일기역주팀 (민속원)
<역주 소현심양일기> 한국학연구원 동궁일기역주팀 (민속원)
<조선의 왕을 말하다> 이덕일 (역사의아침)
<왕이 못 된 세자들> 함규진 (김영사)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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