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팬이 챔피언스 필드에서 꾸는 꿈

2014.08.04

인생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몇 가지가 있다. 국적, 가족, 그리고 가족을 따라 믿는 종교나 응원하는 야구 팀 같은 것. 가물가물한 유년 시절에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가서 앉아있던 것처럼, 아버지를 쫓아 사직구장에 가서 앉아 있곤 할 때부터 나는 롯데 자이언츠(이하 롯데) 팬으로 정해졌다. 한 쪽은 아주 조용하고 다른 쪽은 무척 시끄러웠다는 것, 그리고 양쪽 모두 의자가 딱딱했다는 것 외에 기억나는 점은 거의 없다. 다만 엄마는 성당에서 조용히 좋은 말만 하고 돌아와 평온한 얼굴이 되었는데, 아빠는 어째서 야구장에만 가면 안 쓰던 욕을 하고 거칠게 화를 내는지, 그러면서도 왜 자꾸 가는지가 궁금했다. 우리는 경기를 끝까지 보는 법이 없이 7회쯤이면 집에 돌아오곤 했다. 이기는 날은 이겼으니, 지는 날은 졌으니 이제 그만 보자고 했던 건 아버지가 성질 급한 경상도 사람이라서 인지, 크게 이기고 크게 지는 롯데의 극단적인 경기 스타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굵어지며 종교에 냉담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야구도 한참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지난해 어쩌다 생긴 표로 한국시리즈를 보러 가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이렇게 탁 트인 장소에서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며 맥주를 마실 수 있다니! 그런데 고성방가가 아니라니! 사실 야구를 ‘잘’ 보려면 야구장에 가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경기 상황에 대한 중계와 전문적인 해설이 있고, 태그아웃인지 세이프인지 클로즈업하거나 느리게 보여주는 중계방송을 택하는 편이 게임을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니까. 하지만 야구장에는 중계 화면으로 전해지지 않는 뭔가가 있다. “야구장에서는 도둑질(스틸링)이 합법이며 심판의 눈이나 공만 빼면 어느 곳에나 침을 뱉을 수 있다.” 스포츠 기자 제임스 머레이의 얘기는 선수들을 향한 것이긴 하지만 야구장을 둘러싼 자유로운 공기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내 경우 야구가 재미있어서 야구장에 가기 시작했다기보다 야구장의 이 공기에 맛을 들이면서 야구에 빠진 셈이다. 그리고 늦게 다시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몰랐다. 3월부터 시범경기를 보겠다며 대구, 개막전 때는 부산(비가 와서 취소되는 바람에 찜질방에서 다른 팀 경기 중계를 봤다), 올스타전이 열린 광주…… 전국의 야구장을 다니느라 야구 표 몇 배나 되는 KTX 티켓 값을 지출하고 있다.

올스타전을 보러 간 광주 기아 챔피언스필드는 가장 최근에 지어져 깨끗하기도 한 데다 여러 모로 관중의 편의를 배려한 경기장이었다. 매점과 화장실을 비롯한 편의시설 공간이 좌석 뒤편에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맥주를 사러 가느라 게임의 맥을 놓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특히 이상적이다. “야구장에서 먹는 핫도그는 리츠 호텔에서 먹는 로스트비프보다 낫다.” 험프리 보가트의 이 말은 한국으로 건너오면 ‘야구장에서 먹는 치맥’ 정도로 번역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관중석 사이를 누비는 비어맨들은 무척 고마운 존재다. 귀여운 여성들이 주로 장내 판매를 담당하는 일본에서처럼 맥주도 브랜드 별로 다양하고, 하이볼 같은 다른 주류도 판매하면 더 좋겠지만. 출입 동선이나 구역 표시가 직관적이라 좌석을 찾기 쉬운 것 또한 챔피언스 필드의 장점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접근성은, 이미 시작된 경기의 함성이 들려오는 잠실에서 주차 공간을 찾아 울며 돌다가 멀찍이 대고 저지에 팔을 꿰면서 달려가곤 하던 아픈 기억을 상기시켰다. 



7월 마지막 일요일 잠실에서도 그렇게 간신히 차를 버리고 달려가 ‘익사이팅 존’에서 야구를 봤다. 내야 가장자리, 불펜 바로 옆에 길게 배열된 이 좌석은 파울 볼이 자주 날아들기 때문에 헬멧을 대여해야 입장할 수 있다. “1루 측 익사이팅 존에 앉으면 모든 타자가 나를 향해 뛰어오는 걸 볼 수 있어서 좋아.” 이렇게 말한 친구는 정작 3루 측을 예매해 두었다.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 그날의 어웨이 팀인 롯데 3루수 황재균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자리기 때문이다. 올스타전에 갔을 때는 늘 진지한 에이스로 여겼던 양현종의 가장 해맑은 표정을 봤다. 부담 없는 친목 경기이기도 했지만, 이대형을 비롯한 다른 KIA 타이거즈(이하 KIA) 선수들도 특히 활발하고 즐거워 보였던 건 어쩌면 당연하다. 홈구장이고, 홈팬들이 가장 많이 왔으니까. 야구장의 시설이 어떻건 가서 무엇을 먹건 가장 중요한 건 우리 팀이, 내 선수가 바로 거기에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 야구장은 팀과 팬 사이에 서로 에너지를 주고 받는 장소다. 연장 11회까지 갔던 그날의 경기에서 황재균은 결국 결승 솔로 홈런을 쳤는데, 근접한 자리에서 기를 불어넣은 우리 덕도 조금은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일본 야구의 성지라는 고시엔 구장에서는 검은 흙을 기념품으로 판매한다. 고교 선수들이 꿈의 무대인 여기서 시합을 하고 나면 글러브에 흙을 담아 가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야구장을 그저 흙과 콘크리트 이상의 무엇으로 만드는 건, 선수들의 땀이 뿌려진 역사이며 팬들의 응원 문화다. 이제는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을 야구팬들이 아깝고 애틋해하는 이유도 그저 건물 하나 사라진 이상으로 집단적 추억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아직 못 가본 포항과 마산, 울산 구장까지 방문해 전국 야구장 사이클링 히트를 치고 싶기도 하고, 이대호가 뛰고 있는 후쿠오카 야후오크돔에도 가 보고 싶지만 요즘은 퓨처스리그 상동 구장을 종종 생각한다. 부상이라던가 여러 이유로 2군에 내려가 있는 우리 팀 선수들이 그리워서다.

“누나 요즘 무슨 힘든 일 있어?” 내 인스타그램에 자꾸 야구장 사진이 올라오는 걸 보고 한 KIA 팬이 물었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 가슴에 응어리진 걸 풀고 싶을 때 야구장에 가게 된다는 걸 아는 친구다. 야구장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소리를 지르고 응원가를 부르다 보면 시원한 기분이 든다. ‘빠라바라 빠라바~’ 하며 시작되는 ‘부산 갈매기’ 전주만 들으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가슴이 뛴다. 하지만 직관을 가서까지 지는 걸 보면 안 쓰던 욕을 하고 거칠게 화를 내면서 스트레스가 도로 쌓이고 가슴에 응어리가 생기고…… 그런데도 왜 자꾸 야구장에 가게 될까? 경기에 몰입하는 그 동안만큼은 나도, 나를 둘러싼 현실의 다른 문제들도 야구공보다 작아지기 때문일 거다. 지난 세기의 사직구장이 내 아버지에게도 그런 몰입과 망각의 장소 아니었을까. 어쩌면 어머니의 성당과 아버지의 야구장은 목적이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기능을 하는 장소였을지도 모르겠다. 8월 16일 잠실에서 있는 다음 경기 때는 3루 대신 1루 외야석에 앉아볼까 싶다. 부상으로 지금 선발 출전을 못하고 있는 우리 팀 우익수 손아섭 선수가 그때는 돌아올 테니, 뒤에서 이름을 크게 불러줘야지.




목록

SPECIAL

image '놀면 뭐하니?' 효리X비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