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사심방송’ 김재경 작가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의 ‘덕후’라고 생각한다”

MBC <출발! 비디오 여행> ‘본격 사심방송’ 작가

2014.05.27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긴 팔다리에 대한 예찬에 이어 ‘긴 얼굴’에 대한 농담과 오이를 닮았다는 ‘디스’가 이어진다. 87년생 스타 데인 드한에 대해서는 “최근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할리우드 미남 배우들의 조혼 풍습에 동참했다”며 애통해하기도 한다. 어떻게 내 마음을 읽은 거지? 나른한 일요일 낮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수상하고 웃긴 방송, 올해 21주년을 맞은 MBC <출발! 비디오 여행>의 ‘본격 사심방송’(이하 ‘사심방송’)이다. “PD의 의견 따위 반영되지 않는, 일백 퍼센트 작가의 사심으로 만드는 방송”을 표방하며 지난해 9월 문을 연 이 코너에서는 조정석, 제임스 맥어보이, 조셉 고든 래빗 등 주로 잘생겼거나 잘생김을 연기하는 남자 배우들을 소개하고 놀리며 애정을 토로한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이들의 팬이나 ‘덕후(서브컬처에 몰두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오타쿠’의 줄임말)’들의 공감대를 관통하는 ‘사심방송’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영화의 작품성은 배우의 미남력이 높여준다”고 말하는 김재경 작가를 만났다.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나.
김재경
: ‘영화 대 영화’와, 이철용 성우님이 읽으시는 기획 코너의 대본을 맡고 있다. <출발! 비디오 여행>은 다들 한 번 일하기 시작하면 그만두지 않는 프로그램이라 나도 아주 오래된 막내다.

<출발! 비디오 여행>으로 방송 일을 시작한 건가.
김재경
: 그렇다. 원래 꿈이 방송작가가 아니라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였다.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90년대 초반에는 지금처럼 정보를 주는 채널이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발! 비디오 여행>을 열심히 봤다. 특히 김세윤 기자님이 쓰시던 ‘영화 대 영화’는 그야말로 컬처 쇼크였다. 영화를 저렇게 신선한 시각으로 보다니, 나도 저런 곳에서는 신나게 일할 수 있겠다고 생각만… 하다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갔다.

영화에 빠지게 된 계기가 있었나.
김재경
: 열 살 위 큰언니가 송골매, 구창모, 장국영 ‘팬질’ 하는 걸 보고 자라면서 문화적으로는 유년기가 없었다.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어렸을 때도 MBC <뽀뽀뽀>나 KBS < TV유치원 하나둘셋 >이 아니라 <영웅본색>, <터미네이터 2>를 봤고 다른 애들이 인형 사 달라고 할 때 장국영 브로마이드, 유덕화 달력을 갖고 싶어 했다. 좀 더 자라서는 <스크린>이나 <로드쇼> 같은 영화 잡지를 읽었고,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 때문에 그때부터 ‘비디오 여행’을 했다. (웃음) 부모님도 영화를 좋아하셔서 비디오 가게 심부름을 자주 간 데다 주인 아주머니한테 “어디 가서 나쁜 짓 안 하니까 그냥 빌려주세요. 영화가 좋아서 그래요”라고 조르기도 하면서, <연인> 같은 작품을 중학생 때 봤다. <중경삼림>처럼 정말 좋아하는 영화는 VHS 테이프로 사서 학교 다녀오면 일단 틀어놓고 생활했을 만큼 수도 없이 봤다.

10대 시절을 관통한 최고의 미남은 누구였나.
김재경
: (깊이 고민) 시작은 장국영이었던 것 같고 에드워드 펄롱,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의 브래드 피트, 그리고 첫사랑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토탈 이클립스> 같은 작품을 보면 ‘사람 맞아?’ 싶을 정도로 잘생겼으니까.

그러다 어떻게 해서 <출발! 비디오 여행>의 일원이 된 건가.
김재경
: 광고학을 전공해서 게임 스토리 만들고 박물관 같은 곳의 패널을 제작하는 회사 기획팀에 들어갔는데 당시 내가 쓰는 글은 “2층 화장실 고장, 1층을 이용하세요” 같은 거였다. (웃음) 자괴감에 빠져 있던 중 우연히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를 구한다는 공지를 봤고, 마침내 작가로 뽑혔을 때가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나는 정말 <출발! 비디오 여행>의 광팬이었으니까, 나 같은 애가 여기서 일할 수 있다니! PD님이 나를 ‘작가님’이라고 불러주신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심방송’에서는 본인이 과거에도 프로그램에서 종종 ‘사심’을 어필해왔다고 회고하던데, 이를 본격적인 코너로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김재경
: 1,000회를 맞아 감사했던 분들에게 상을 드리는 콘셉트로 ‘어워즈’를 기획했는데 뭔가 재밌는 걸 하고 싶었다. 무슨 상을 만들어야 내가 좋아하는 하정우 씨를 등장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작가 사심상’을 주겠다고 했다. 욕먹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은 걸 보고 메인 작가 언니가 “너 원래 배우 좋아하면 정신 못 차리니까 아예 코너로 해 보는 건 어때?”라고 해서 레귤러가 된 거다.



그렇다면 어느 시점부터 ‘사심방송’이 좀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나.
김재경
: 솔직히 초반에는 구성도 엉망이고 중구난방이었는데 4회 베네딕트 컴버배치 편이 방송되자 많은 분들이 ‘이건 재밌더라’ ‘그건 좀 불편하더라’ 같은 평을 올려주셔서 참고했고 나름대로 가이드라인을 잡아나갔다. 앞부분에서는 일반 시청자들을 위해 이 배우가 이런 영화에 나온 이렇게 생긴 배우라는 정도의 기본적인 정보를 주고 후반에는 열성 팬들만 알 만한 매력, 특이한 면을 살짝 언급하면서 약간의 개그도 하고 연기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편이다.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스틸 사진, 팬아트 등 방대한 양의 자료를 모아 6, 7분에 압축할 때 선택의 기준은 뭔가.
김재경
: 영화를 보면서 좋아하거나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고르고 SNS에 국내외 팬들이 올려주시는 자료도 참고한다. 영어 인터뷰를 듣고 적어가면서 공부하기도 하는데, 예전에 오다기리 조를 좋아할 때는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배울 때보다 일본어 실력이 급격히 늘기도 했다. 드라마의 경우 국내에서 DVD가 정식으로 발매되지 않으면 방송에 쓸 수 없다. 그래서 <셜록>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편의 소스로 쓸 수 있었지만 매즈 미켈슨 편에서는 <한니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공식 홈페이지나 imdb에 올라온 것, 배우가 직접 공개한 이미지 정도만 사용할 수 있다. 팬 아트는 가급적 안 쓰려고 하는데 정말 재미있거나 그거 빼면 얘기가 안 되겠다 싶을 때만 살짝 사용한다.

그동안 시청자들이 잘 알든 모르든 사심으로 야심 차게 내놓은 배우가 있다면.
김재경
: 6회의 애런 존슨이다. <상하이 나이츠>(2003)에서 처음 봤는데 어린아이인데도 진짜 잘생기고 섹시한 거다. 그런데 차마 어디 가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어서 10년 동안 끙끙 앓았다. (웃음) 그래도 계속 지켜보면서 열심히 소개했는데 ‘사심방송’ 직후 애런 존슨이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 4천대에 진입했다. 그때 정말 ‘이 맛에 덕질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 인물이 있나.
김재경
: 캐나다의 감독 겸 배우인 자비에 돌란. 이번에 개봉한 <탐 앳 더 팜>으로 예술영화 코너에 소개하려고 밀어봤는데 채택이 안 됐다. 그리고 <설국열차>에 ‘그레이’로 나온 영국 배우 루크 파스콸리노, 드라마 <스킨스>에도 출연했는데 아직 영화 출연작이 적어서 자료만 모으며 트위터를 지켜보고 있다. 애런 존슨에게 그랬듯 ‘아시아 내조 담당’이 되어 뒷바라지하는 마음이다. (웃음)

그런데 ‘덕질’을 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취향과 활동에 대해 실명을 밝히고 이야기하거나 오프라인에서 드러내는 걸 꺼리지 않나.
김재경
: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의 ‘덕후’라고 생각한다. 고양이, 오토바이, 자동차 등 그 대상이 각자 다를 뿐이다. 영화나 배우에 대한 관심 역시 이상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숨기고 싶은 적은 없었다. 아이를 낳은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서로 관심사가 달라 대화가 잘 안 통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피프’ 얘기가 나오면 나는 부산국제영화제(PIFF, 2011년 BIFF로 바뀌기 전까지의 영문 약칭)를 떠올리는데, 애들이 말하는 건 유아용품 브랜드(PIP)다. 그래서 내가 요즘 무슨 영화의 누가 잘생겼다고 하면 “너 아직도 그러고 사니?”라고 하는 친구도 있는데, 나는 “아니, 그게 아니라…” 하면서 기죽는 대신 “그래, 이러고 산다. 이게 어때서!”라고 한다. (웃음)

배우에게 사심을 갖는 팬인 동시에 영화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진으로서 경계가 고민되지는 않나. 팬들은 가장 열성적인 시청자인 동시에 냉정한 비판자이기도 할 텐데.

김재경
: 어떤 편은 재미는 있지만 정보가 얕다거나, 그 배우에 대해 깊은 얘기를 하기를 바랐는데 특정 작품 위주로만 얘기했다거나 같은 비판도 종종 받는다. 사실 배우의 사생활을 비롯해 모든 면을 아무리 열심히 조사해도 팬들만큼 넓고 깊게 알 수는 없다. 단점을 살짝 놀릴 때도 “우리 오빠는 예쁜 건 크게 보라는 의미에서 머리가 큰 것이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고 “머리 큰 게 어때서 그러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으니까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그런데 ‘사심방송’에 나온 배우들은 내가 길게든 짧게든 한 번은 좋아했던 배우들이고 영화를 보면 금방 반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대본을 쓸 때는 진심으로 사랑에 빠져서 한다.

‘사심방송’을 포함해 <출발! 비디오 여행>의 매력은 A라는 작품이나 배우를 소개하기 위해 다른 작품 B, C, D에서 가져와 삽입하는 짧은 대사나 장면들이다. 언제 넣어도 빵 터지는 재미를 보장해주는 장면이나 대사가 있다면.
김재경
: 송강호 씨 대사가 그렇다. “밥은 먹고 다니냐”처럼 평범한 대사도 맛깔나게 해주셔서 아쉬울 때는 송강호 씨 출연작 보면서 대사를 찾는다. 감독 중에서는 강우석 감독님이다. 비껴 찍는 것 없이 정직한 앵글이라 정면 샷이 많아서 <공공의 적> 시리즈를 많이 썼다. 설경구, 하정우, 조정석 씨 대사도 자주 사용한다. 항상 노트북 옆에 이런 분들의 영화 DVD가 있다.

앞서 얘기했듯 90년대와 달리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채널이 무수히 많아졌다. <출발! 비디오 여행>은 이처럼 변하는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려고 하나.
김재경
: 예전에는 모두에게 도움을 줄 만한 일반적 정보를 위주로 했다면, 요즘은 ‘우리만’ 할 수 있는 내용을 담으려고 한다. 게다가 다른 영화 프로그램은 우리보다 하루 먼저 방송하니까, ‘어제 본 거 오늘 또 본다’가 아니라 ‘어제보다 재미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다. ‘사심방송’도 그런 의미에서 기획된 코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재밌는 대사들을 편집해 넣는 것도 그런 노력 가운데 하나다.

그런 면에서 ‘사심방송’을 통해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이 활기를 띠고 있다는 게 느껴지나.
김재경: 원래 30~40대 여성 시청자가 많았는데 요즘은 10대들도 많이 봐주시는 것 같아서 보람이 있다. 항상 시청률이 걱정인데 SNS에서는 늘어난 관심을 느낄 수 있다. 오프라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웃음)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게 되면 싫어진다는 얘기가 있다. 꿈꾸던 일을 계속 하며 산다는 건 어떤가.
김재경
: 뭐든 빠르게 하는 편이 아니라 처음 들어와서 3분짜리 원고를 쓰는 데도 24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20분에 가까운 ‘영화 대 영화’를 처음 맡았더니 써도 써도 끝이 안 나는 거다. 그래서 더빙을 하루 이틀 늦춘 적도 있는데, 그때는 이렇게 민폐를 끼치면서 일을 해야 하나, 너무 내 욕심만 차리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많이 힘들었다. 그런데도 일을 놓기는 싫었다. 그 시기를 좀 지났더니 그렇게 힘든 적은 없다. 나는 내 일을 많이 사랑하고, <출발! 비디오 여행> 제작진으로 있는 게 좋고, ‘영화 대 영화’를 쓰고 있는 게 행복하다. 아마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오늘 마감을 할 거다.

혹시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 원대한 꿈이 있나.
김재경
: 지금은 엄두도 못 내고 있지만 영화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다. 시놉시스만 여러 개 써 놨다.

인종과 국적과 실현 가능성을 떠나 캐스팅하고 싶은 남자 배우는?
김재경
: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질 못해서 잘 때도 배우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매즈 미켈슨에게 가위눌린 적도 있다. 오다기리 조에 한창 빠져 있을 때는 그를 위한 맞춤 시나리오를 열심히 썼고, <007> 시리즈 같은 스타일리시한 첩보물을 만들 수 있다면 톰 히들스턴을 캐스팅하겠다. 아니면 데인 드한세바스찬 스탠을 캐스팅해서 퀴어 멜로 영화를… 와, 그럼 정말 좋겠다! (웃음)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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