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 사랑한 배우│① 박해수 “고전은 인간관계가 수평, 수직으로 공존해 매력적이다”

2014.03.07

① 박해수 “고전은 인간관계가 수평, 수직으로 공존해 매력적이다”
② 지현준 “좋은 작품일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 고전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고전은 ‘제목은 알지만 내용은 잘 모르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어렵다는 인상이 있고, 고리타분하다는 편견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이 주는 미덕을 온몸으로 껴안는 배우들이 있다. 본능에 충실한 노동자 스탠리(<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부터 결핍으로 스스로를 처단한 희곡 작가 지망생 꼬스쟈(<갈매기>), 거대한 운명에 짓눌린 오이디푸스 왕(<더 코러스: 오이디푸스>)까지. 올해로 서른넷이 된 박해수는 8년의 시간 동안 고뇌를 짊어진 캐릭터와 함께 성장해왔고, “존재감이 있으면서도 젠틀하고 신선한 젊은 인물”을 찾던 국립극단은 3월 8일부터 공연되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박해수를 선택했다. 맥베스는 ‘장차 왕이 되실 분’이라는 마녀의 예언과 아내의 부추김으로 친척이었던 선왕을 죽이고, 가장 친한 친구를 죽이며, 결국 아내를 잃고 본인 역시 죽음에 다다른다. ‘다나까’체로 <맥베스> 연습 과정을 옮기던 그는 독한 설정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는 고전을 통해 깊이만큼이나 기본기를 다시 찾았다고 말했다. 박해수의 말로 클래식의 다른 이름은 ‘기준’이라는 것을 알았다.



2013년 마지막 작품이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이하 <오이디푸스>)였는데, 2014년의 첫 작품 역시 고전인 <맥베스>를 선택했다.
박해수
: 솔직히 명동예술극장, 국립극단이랑 작업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 (웃음) 뮤지컬도 하고 드라마도 찍었지만 아무래도 연극으로 시작했으니까 연극계 선생님들이랑 선배님들도 만나 뵙고 싶었고. 근데 작업을 하다 보니 그런 것들보다 연기를 완~전 기본부터 새로 배우고 있는 것 같아서 지금은 그게 제일 좋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갈매기>, <오이디푸스> 등의 작품을 하면서 나름 고전에 대한 노하우가 생겼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박해수
: 밖에서 연기를 한 지 8년 정도가 되는데, 내가 갖고 있는 스타일 같은 게 있다.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면, 대사 칠 때 끝을 약간 흘리거나 강세를 두는 위치 같은 습관들. 굉장히 깨고 싶었던 어떤 것들이 있는데, 그걸 신체훈련, 보이스 코칭, 발음 교정, 발성법 등의 과학적인 수업으로 깨고 있다. 이병훈 연출님은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배우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일정 시간을 투자한다. 사실 이건 내가 돈을 내야 될 정도다. (웃음)

배우의 표현이라는 지점에서 고전의 관념적인 대사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전달하느냐에 대한 고민도 많았겠다.
박해수
: 어미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쉽게 얘기하면 ‘했다’ 하나에도 한국어는 ‘~했구나’, ‘~했소’와 같이 다양한 버전이 있다. ‘~했어’나 ‘~했지요’ 같은 건 가벼워지는 구석이 있다 보니 ‘~했소’를 주로 쓰는데, 그 어미를 쓸 경우 특유의 사극톤처럼 변하는 게 있어서 선생님도 그 지점을 제일 유의하고 계신다. 특히 맥베스 같은 경우에는 독백이 많아서 더 걱정이다. 결국 모던하게 대사가 나오려면 분명한 감정선과 방향성, 의지가 확실하게 있어야 모호해지지 않는다. 마음가짐, 몸가짐은 선생님이 다 만들어주셨으니 이제 뛰어들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뭔지는 알지만 잘 안 된다. (웃음) 과정은 정말 최고인데….

잘해야 된다는 부담감은 고전이 주는 중압감 때문인가.

박해수
: 학교 다닐 때 <맥베스> 대본을 두어 번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공연을 본 적은 없어서 비교 대상이 아예 없다. 대신 한 인물이 고민하다가 폭군으로 변한다 정도로만 알고 있던 이 작품이 연습을 하다 보니 셰익스피어 작품 중 최고라는 생각이 들어서 걱정이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가장 현대인과 잘 어울리는 작품이 <맥베스>라고 한다. 욕망과 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적이고 폭력적으로, 굉장히 빠른 템포로 진행된다. 부부 얘기로 갔다가 친구 얘기로 가기도 하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 확 거대해진다. 특히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인물의 자유 의지가 강해 고전을 고전처럼 해도 모던하게 느껴지는 감정선들이 있다.

어떤 지점들이 와 닿았나.
박해수
: 맥베스 대사 중에 이런 게 있다. “저 던컨 왕을 죽이면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할 거고 눈물을 폭풍같이 억수처럼 쏟아낼 것이다. 분명하다. 그래서 난 죽일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야심만 날뛰고 있다. 그게 지나쳐서 난 다른 데로 나가떨어지고 말 지어다.” 맥베스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고,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 나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쓴 적이 있어서 그런 지점들이 가깝게 느껴졌다.

맥베스는 왜 그렇게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썼을까.
박해수
: 연습 초반에 <맥베스> 전문가 선생님들을 모셔서 거의 대학원 수준의 강의를 들었는데 (웃음) 맥베스는 왕 대신 시인이 됐어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고 하더라. 굉장히 시적인 대사가 많고, 그만큼 감수성도 상상력도 대단한 인물이라는 거다. 정신적으로 결핍이 많은 사람이라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갖고 싶은 것도 많다. 그런데 장군이라 명성도 잃고 싶지 않은 거고. 그래서 꼭 정치적 권력이 아니더라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욕망이 있지만 그걸 숨기고 사는 현대인과 비슷하다.

과거 “자신감이 부족하긴 하지만 불안에 떨거나 하는 건 별로 없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감정적으로 예민한 인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느끼진 않았나.
박해수
: 인간이니까 두려움, 불안에 대해서는 익숙한 부분이 있긴 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고통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 전에 느끼는 사람이라서 계속 환영이 보여야 한다. 선생님께서는 철철 흘러넘치는 피 같은 이미지들을 눈에 담아놔야 한다고 처참한 그림들을 많이 보여주신다. 그래야 대사 할 때도 그게 그려지니까. 근데 역시 쉽지 않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어머니에게서 아이를 얻는다는 운명적 설정의 오이디푸스에 비하면 ‘갖고 싶은 것’이라는 점에서 맥베스는 이해의 폭이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직 잘 모르겠다 싶은 게 있나.
박해수
: 맥베스에게는 큰 감정 변화가 4번 정도 있다. 왕을 죽이기 전의 두려운 상태, 죽인 후 고통을 느낄 때, 브레이크가 풀려 욕망에 지배당했을 때, 나중에 아내가 죽고 인생을 뒤돌아보며 허무함을 느끼는 순간. 마지막 두 가지가 힘들다. 선생님이 며칠 전 BBC에서 방송했던 <맥베스>를 보여주셨는데, 맥베스가 친한 친구인 맥더프의 목에 칼을 겨누었을 때 등장한 마녀에게 딱 한마디 하더라. “Enough.” 맥베스는 ‘왕이 되어야만 한다’가 있어서 두려움과 불안을 이기고 난 이후에는 망상을 보지 않고 실제로 살육을 하기 시작한다. 누구나 욕심이 과해질 때가 있는데 보통은 나이가 들면서 현명하게 어떤 비전으로 바뀐다. 근데 맥베스의 상황은 내가 만약 어떤 배역이 되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누군가를 긁어서라도 빼내야 되는 것과 비슷하니까. 참 어리석은 사람인 것 같다.

<오이디푸스>와 <맥베스> 모두 비극이지만, ‘왕’이라는 목적을 위해 선왕과 거슬리는 주변 인물을 다 죽이는 과정이 운명에 순응하는 오이디푸스에 비해 더 에너제틱한 것 같다.

박해수
: 강의 때 운명비극이냐 성격비극이냐를 나눠야 하는데 그걸 정확히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합쳐질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시더라. 오이디푸스 같은 경우에는 정말 큰 운명이 위에서 누르고 있는 상태인데 어찌 보면 백성을 구하겠다는 선한 의도로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여 문을 하나씩 통과해가면서 지나간다. 그런데 맥베스는 걔보다 더 적극적이다. 나중엔 악을 스스로 불러들이니까. 자기가 막 문을 찢으면서 나가는 느낌이지. 그 점에서 오이디푸스에 비해 맥베스가 더 자유 의지가 있다고 느껴지는 거다.

그만큼 에너지를 쏟아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
박해수
: <오이디푸스> 할 때는 가위에 자주 눌렸다. 워낙 영혼이 상처받는 역들이라 내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어서 더 나 자신이 바로 서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악마는 마음속 다른 방에 불러오는 식으로. (웃음) 그래서 작품을 동시에 못 한다. 한번 하면 또 충분히 쉬어야 하고. 연습부터 본 공연까지 따지면 한두 달에서 많게는 세 달까지 집중을 해야 하는데 그 정도가 딱 나의 배터리 같은 느낌이 있다.

레이디 맥베스 김소희와는 나이 차도 많이 나고 사제지간이기도 했다. 게다가 인생의 허무함이라는 지점까지 표현해야 하는 캐릭터라서 왜 이 작품이 벌써 나에게 왔지? 싶은 아쉬움은 없었나.
박해수
: 주눅 들지 않고 내가 더 감정을 쭉쭉 가줘야 하는 건 분명히 있지만 김소희 선생님이 워낙 베테랑이시라 걱정은 안 한다. 그런데 인간으로서는 죽음 앞에 이르렀지만 정신적으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그 순간을 ‘아, 이게 인생이었고 인생이란 건 짧은 촛불이구나’라는 감정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하아… 정말 연륜 있는 선생님들이 뒤를 딱 돌아봤을 때 느껴지는 그 인생의 허무함이 나한테는 아직 없다. 물론 나중에 또 할 수 있다면 더 알지 않을까 싶은 건 있지만, 언제나 깊이에 대해서는 만족할 수 없는 것 같다. 나이가 되게 많이 든다고 해도 모를 수 있으니까 나한테는 지금이 적절한 것 같다.

그동안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안톤 체홉의 작품을 하나씩 해봤는데 각각 어떤 매력이 있는 것 같던가.
박해수
: 제가 감히. (웃음) 느낀 대로 얘기해보자면 그리스 비극은 시대가 그랬으니까 신이 빠지고서는 얘기가 안 되는 것 같다. 셰익스피어로 와서는 좀 더 인간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게 되었고, 체홉은 셰익스피어보다 인간의 이야기를 더 하고. 선생님 얘기로는 그렇다. 그리스 비극은 스포츠로 얘기하면 레슬링이고 체홉은 바둑이라고. 체홉의 작품들은 인물들이 저돌적으로 부딪히는 게 아니라 돌리고 돌려서 은연중에 숨기고 얘기하다가 나중에 탁 튀어나오는 것들이 많다. 체홉을 너무 좋아해서 학교에서는 체홉 작품을 많이 했었다.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는 너무 시적이라 이걸 표현해내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고 그래서 재밌다.

어째 청개구리처럼 쉬운 길을 안 가는 것 같다. (웃음)
박해수
: 어려운데 이런 배역이 더 재밌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인간관계에서 오는 이야기를 다루는데, 인간관계가 수평, 수직으로 공존하는 게 고전이더라. 모두가 다 수평적이어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게 아닌, 옆으로도 위로도 같이 들어가니까 다차원적이고 깊어진다. 그래서 할 얘기가 더 깊고 연구할 거리도 많고 트레이닝 면에서도 도움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학교 다닐 때 <햄릿>을 했는데, 앞으로 할 수 있다면 <햄릿>보다는 <리어왕>을 하고 싶다. 꼬스쟈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잘하진 못해도 했으니까 <갈매기>에서는 나이 들어서 뜨리고린을 하고 싶고. 고전은 계속 하고 싶으니 계속 불러줬으면 좋겠다. (웃음)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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