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 사랑한 배우│② 지현준 “좋은 작품일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

2014.03.07

① 박해수 “고전은 인간관계가 수평, 수직으로 공존해 매력적이다”
② 지현준 “좋은 작품일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 고전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고전은 ‘제목은 알지만 내용은 잘 모르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어렵다는 인상이 있고, 고리타분하다는 편견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이 주는 미덕을 온몸으로 껴안는 배우들이 있다. <햄릿>과 <갈매기> 등의 작품을 하기도 했지만, 지현준은 시간이 아닌 존재론적인 고민으로 고전의 정의를 새로 쓴다. “당신은 여기 존재하고 있어요”라는 대사를 내뱉기도 했던 게이 댄스 강사 마이클(<여섯 주 여섯 번의 댄스레슨>)과 독일의 거친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힘겹게 지켜온 샬롯(<나는 나의 아내다>), 지옥문 앞에서 선과 악, 죄와 벌, 신화와 현실을 체험한 단테(<단테의 신곡>)까지. 끊임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찾아 헤매던 그가 오는 3월 14일부터 극단 실험극장이 준비한 피터 쉐퍼의 <에쿠우스>에 알런 역으로 또 다른 변신을 꾀한다. 말을 신격화했지만 결국 그 말의 눈을 찌르고야 만 알런. 끊임없이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을 통해 지현준은 편견을, 한계를, 그리고 지현준을 깬다.



사진 찍을 때 순간 몰입도가 엄청 좋더라.
지현준
: 5~6년 전만 해도 되게 창피했는데 이제는 그 순간으로 들어가는 게 빨라지긴 했다. 요즘은 흉내 내기보다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세계로 좀 더 빨리 넘어가서 그 안을 정확히 보려고 한다. 이건 작품을 꾸준히 하게 되면서 생긴 부분인 것 같고, 이제는 연극이 진짜 삶이 됐다는 느낌이라 정말 좋다.

이번에 <에쿠우스>의 알런 역으로 캐스팅이 됐는데, 2009년과 2010년의 알런(류덕환·정태우)들이 소년의 이미지가 강해서 캐스팅만으로 호불호의 중심에 섰다. (웃음)
지현준
: 내가 알런을 하는 거 자체가 이변이다. 20년 넘게 별명도 말대가리였으니까. 이미지라는 게 무서운 것 같다. 대본 어디에도 알런이 작고 소년 같다는 설명이 없다. 그냥 볼이 움푹 파인 열일곱 살짜리 청소년이라는 것뿐인데. 이지나 선생님은 “야야, 네가 다 때려죽이게 생겼는데 연민이 느껴지겠니?” 하시더라. (웃음) 그래서 말과 혼연일체가 돼서 진짜 리얼하게 하려고.

열일곱 살의 감정은 찾았나.
지현준
: 그때는 다 자기중심적이라 굉장히 이기적이고 감춰뒀던 걸 꺼낼 때는 정말 거침이 없다. 그래서 그걸 순수하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가장 악하다고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배우가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어리거나 늙은 연기를 할 때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절대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는 배우의 딜레마가 있는 것 같다. 게다가 10년 정도 위면 할 만할 것 같은데 지금 뭐 나는 거의 20년 위니까. (웃음) 몸과 집중력의 열기가 식어버리고 쓸데없는 무게가 생긴다. 난 그게 장점이었는데!! (웃음)

알런은 부모의 종교와 권위에 억눌린 아이인데, 지현준의 사춘기는 어땠나.
지현준
: 여섯 살 때까지 잘살던 집이 아버지가 뭐만 하면 망하기 시작했다. (웃음) 동생은 장애가 있지, 그러니까 공부에 대한 푸시가 엄청났다. 공부해서 성적 잘 나오면 뭐라 하지 않으셨으니 내 것을 꺼내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는 양아치들이랑 놀았다. (웃음) 그때 이동반이라는 게 처음 생겼는데 전교 1등 이런 애들이랑 노는 게 너무 재미없어서 난 그 반이었는데도 만날 담배 피우는 애들이랑 놀았었다. 얘네가 예쁜 것도 사주고 여자도 소개시켜주고 재밌는 데도 데려가고. 가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에서 알런이랑 비슷했다.

<에쿠우스>는 말을 신격화하는 알런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크리스찬이기도 해서 작품에 대한 거부감이 들진 않았나.
지현준
: 처음에는 있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크리스찬이지 않을까 싶었다. 가장 추한 곳으로 들어가 정확하게 들여다봐야 하고 그 안에서 어쨌건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연극배우가 이걸 거절하는 게 아니라 잘 해내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대본을 보니 알런은 말을 신으로 숭배한다고 해놓고 말을 탄다. 이건 신을 탄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알런은 말을 자신의 욕망 표출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고 그걸로 인해 스스로 피폐해져 간다는 걸 알았다.

알런의 감정은 강박이나 갈망, 죄책감 등 굉장히 많은 것이 뒤섞여 있고, 전라 연기는 배우에게 심리적 장벽이 높기도 하다. 어떤 게 <에쿠우스>로 이끈 것 같나.
지현준
: 항상 작품들이 상황과 맞아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허무함이었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사람 이해하는 것도 힘들고. 이게 뭐지 싶었다. <에쿠우스>를 하기 전 점점 무대에 서 있는 게 발가벗고 명동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옷을 입을 수도 없고 함부로 걸어가지도 못하겠고 사람들은 다 이상하게 쳐다보는데 나는 거기서 내 얘기를 해야 되고. 그래서 <갈매기> 대본을 다시 봤는데 거기서 니나가 마지막에 “손을 어떻게 써야 될지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난 견뎌내는 배우가 되겠다, 삶은 견뎌내는 거다, 난 마음껏 연기할 수 있다”라는데 너무 와 닿았다. 배우는 벌거벗고 다녀야 하는 사람 같다. 또 홀딱 벗어야 하니까 이거 해야 되는구나 싶고. (웃음) 신, 인간, 섹스에 대한 거는 늘 고민하는 것이기도 하고.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전라 연기라는 건 배우 스스로를 깨는 최후의 단계 같은 느낌이 든다. <여섯 주 여섯 번의 댄스레슨>의 게이 연기, <나는 나의 아내다>의 1인 35역 연기 등 매번 한계를 극복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번에 깨고 싶은 건 뭔가.
지현준
: 나. 10년 연기를 했고 주인공 위주로 하다 보니 연기관이 있다. 나도 머리가 커져버린 거다. 내 생각이 생겼는데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강요받기 시작하니까 거기서 스트레스가 시작됐다. 근데 그게 연극이다. 연극이라는 게 아니었다면 맹목적으로 누가 그렇게 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나. 그동안 그렇게 깨부수면서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길도 갈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그게 결과적으로 어떤 자유를 주는지도 알게 됐다. 이번에도 연출님이랑 생각이 정말 다른데 극복하고 거기서 또 다른 설렘을 느낄 거다.

좀 전에 <갈매기>를 다시 봤다고 했는데 평소에도 종종 되돌아보나.
지현준
: 연희단 거리패에 있을 때 이윤택 선생님이 하셨던 말들이 하나씩 생각날 때가 있다. 옛날에 연기 배우면서 적었던 책들을 다시 보기도 하고. 특히 고전은 당시에는 몰랐던 것들을 이제 무슨 얘긴지 조금씩 알게 되면서 더 보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 “상상이나 고전같이 텍스트 뒤에 엄청난 백그라운드가 있는 걸 좋아했다”고 했다. 고전은 주로 존재론적인 고민을 다루고 그 고민은 작품에서도 현실에서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할지에 대한 걱정도 많지 않나.
지현준
: 좋은 작품일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 근데 그런 게 진짜 우리 삶 속에 존재하고 있고 연극이니까 표현할 수 있구나 싶어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노드라마였던 <나는 나의 아내다> 때 관객을 어떻게 데리고 가야 할지 엄청 고민됐었는데 어차피 사람을 데려갈 수 없다. <에쿠우스>도 그렇다.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리얼하게 관객에게 전달할 것인가. 결국 그 문제다. 예전에는 관객에게 180을 줘야지 했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다 빼서 관객이 내가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을 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게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드니까 매일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게 됐고. 당장에 티는 안 나도 그런 것들이 모여 무대에서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결론이 나지 않아도 관객에게 어떤 여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배우가 꿈이라고 떠들고 다녔더니 없어지게 생겼다. (웃음)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지현준
: <나는 나의 아내다> 끝나고 세상에서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이윤택 선생님이 배우의 단계에 대해 해주신 얘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처음엔 내 연기 하느라 정신없을 거고 연기를 떠나서 나와 내가 만나는 시간을 가진 후 배우와 캐릭터를 고민하는 시간이 생기고, 그럼 상대방이 보일 거고, 상대방이 보이면 관객이 보일 거다. 관객이 보이기 시작하면 세상이 보일 거고,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면 더 넓은 우주가 보일 것이다. 그게 보이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일 것”이라고. 정말 그렇게 되고 있다. 허무가 찾아왔지만 그 허무함을 극복하기보다는 받아들이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할 만큼만 하면 충분하다.

작년에 연극과 관련된 상을 다 받으면서 거기서 오는 부담감이나 혹은 나태함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
지현준
: 고민이 한창일 때 상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히려 신인상이라 다행히 한 발 떼고 마음껏 실수해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다시 연희단 거리패에 들어간 것 같고, ‘아, 내가 이렇게 연극 했지, 정신 차려야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많이 노력해야 하나 얻는 스타일이라서 나태해질 수가 없다. 이제는 그동안 해왔던 걸 유지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하루 안 움직이면 이틀, 사흘 퇴보하는 시기니까. 기타 하나를 배워도 손가락이 터지면 뭔가를 얻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때가 있었고, 그게 지겹다 싶은 때도 있었다. 이제는 스트레스받던 시기도 지나갔고 습관적으로 하는 느낌? 생활이 된 것 같다.

일반적인 현실과 본인이 닥친 상황의 갭이 점점 커지면서 그런 고민이 더 시작됐나 보다.

지현준
: 연기를 같이 하던 30~40대 내 친구들은 가족이 생기면서 학원에 들어가 매달 250만 원을 받으며 산다. 그들을 뭐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그걸 놓지 못하니 그 친구들의 평생 몫이 250만 원이다. 주변 친구들은 다 결혼했고 사랑해서 결혼해도 의도치 않게 한순간 바람피워서 이혼하고, 믿었던 사람들은 다 평범하게 살고 있고. 내가 가는 길은 그런 길이 아니라서 어려운 것 같다. 배우는 세상에 깊이 뿌리를 박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너무 어렵다. 예전에는 작품 때문에 게이바를 가면서도 술 안 먹고 꼿꼿이 자리를 지키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겠다는 욕심도 있었다. 연극배우들은 노력하지 않고 사는 것 같았고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캐스팅에서 나 혼자 제외된 적도 있다.

스스로 만들어놓은 지현준의 삶이라는 그릇을 깨고 있는 것 같다.
지현준
: 어떤 맹세를 고집하는 것 역시 내 한계인 것 같았다. 이제는 세상도 알면서 하늘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과거에는 배우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는데 배우는 그런 존재이면서도 한없이 하찮다는 걸 알게 됐다.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지만 충분히 흔들리면서 가야 할 것 같다. 실수하면 실수하고 행동할 수 있을 때 행동하고. 솔직하게 살아야겠다.

50~60대까지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서 연기를 시작했다고 했다. 최근 선생님들과 작업을 많이 했는데 직접 본 미래는 어떻던가.
지현준
: 박정자 선생님이 깨끗한 신발로 갈아 신고 무대에 들어가시는 거나 정동환 선생님이 연기에 집중하는 모습들에서 그들이 연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볼 수 있었고 그게 너무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세가 저분들을 저렇게 만드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난 또 나만의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이윤택 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어떤 배우 하나가 전쟁 중에 나와서 연기를 했는데 휴전이 됐다고. 난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아마도 알런처럼 주변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 같다. (웃음)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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