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청곡을 딛고 ‘일어나’

2013.11.26

2013년 11월 26일 날씨 맑음
브리즈번에 온 지 5개월 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브리즈번에 있기로 예정된 기간의 절반이 지났다는 의미다. 워킹홀리데이 비자 기한은 1년이지만 10개월 정도만 머물 생각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했다. 가게 하나하나에 직접 들어가 이력서를 내고, 영어로 면접을 보고, 그렇게 선글라스 세일즈 일을 두 달 동안 했고, 또다시 면접을 보고 합격해 공장 일을 하고 있다. 반드시 먹고살기 위한 일이 아니더라도 많은 일이 있었다. 집을 직접 보러 다니며 이사를 한 번 했고, 열흘 치 방값을 한 번에 벌금으로 내기도 했고, 많은 사람을 만났고 또 만나고 있다. 별다른 대책도 계획도 없이 겨우 한 달 생활비만 들고 왔지만, 일단은 살아남았다. 한참 일을 못 구해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다니던 7월에, 길에서 만난 호주 할아버지가 그랬다. “넌 곧 일을 찾게 될 거고, 너의 호주 생활에는 행복이 가득할 거야. 날 믿어.” 그리고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행복해질 테니.” 브리즈번에도 태풍이 불고 내 몸과 마음에도 태풍이 부는 시기를 지나며 다시 한 번 주문처럼 중얼거려본다. Don’t worry, Be happy.

2002년, 겨울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카페촌에서 일하면서 좋은 점은 역시 노래를 라이브로 듣는다는 것이다. 보통 처음에는 신기해하다가 점점 무뎌진다고 하는데, 나는 매번 재미있고 신난다. 가끔 오픈 조로 출근을 하는 날에는 운이 좋으면 가게를 청소하면서 오디션 현장을 볼 수도 있다. 메인 가수를 제외한 가수들은 종종 교체가 되는데,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한 오디션이다. 보통 사장님과 매니저가 면접과 심사를 한다. 가게의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사실 사장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반 장난으로 나도 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나름 최선을 다해 노래방 반주에 맞춰 나의 18번인 진주의 ‘난 괜찮아’를 불렀지만 사장님은 허허 웃으며 노래방 기계 점수를 가리켰다. 87점. 90점이 안 넘어서 안 된다는 말에 하루 정도 삐쳐 있었던 것은 나만의 비밀이다.

미사리 카페촌의 공연은 대개 주말에 메인 가수 시간이 있고, 나머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가수들이 채운다. 무명 가수라고 하기엔 미안하지만, 솔직히 유명한 건 아닌 가수들이다. 그래도 평일 프라임 타임에 노래하는 가수들은 소수지만 팬들이 오기도 하고, 앨범을 냈다면서 CD를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앨범에 실린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미사리 카페촌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노래를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신청곡을 받고, 무대 위로 전달해서 그 노래들을 부른다. 당연히 노래방 반주는 필수다. 물론 노래를 촌스럽게 만드는 멜로디 제거 버튼을 누르고 말이다. 신청곡 종이를 받아서 가수에게 건네주는 것도 미사리 알바생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보통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은 하기 싫어하는 일이라 신입 알바생들이 하게 된다. 하지만 난 알바 경력이 중간 이상이 됐는데도 열심히 신청곡 종이를 전해주는 일을 한다. 손님들에게 종이를 받은 뒤 거기 적힌 노래 제목이나 짧은 사연들을 읽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지난주에 오디션을 봤던 밴드의 두 번째 공연이 있는 날이다. 오픈 조라서 오디션을 볼 때 같이 있었는데, 오디션 곡은 들국화의 ‘행진’이었다. 보컬은 전인권을 따라가는 것도 벅차 보였지만, 어찌 됐건 사장님은 주말 새벽 시간, 그러니까 메인 타임이 끝나고 여운이 남은 손님들이 좀 남아 있는 시간을 그들에게 내주었다. “우리 가게에 없는 스타일이잖아. 한번 해보지, 뭐.” 아 근데 사장님, 제 점수는요….

어제 첫 공연을 한 그들은 어딘지 피곤해 보였다. 어제 공연은 좋지 않았다. 쉬지 않고 노래만 할 수 없으니 보컬이 멘트도 하고 해야 하는데, 보컬은 아예 말주변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오직 준비해온 노래만 부른다는 것이었다. 내가 건네는 신청곡 종이는 힐끗 보고 말았다. 사실 밴드라 노래방 반주 대신 연주를 하니 아무 신청곡이나 부를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들국화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주현미의 ‘짝사랑’이나 나훈아의 ‘잡초’를 부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어제 새벽, 얼큰하게 취한 손님 하나가 계속 신청곡 쪽지를 올려 보내다 단 한 곡도 나오지 않자 폭발해버린 것이 문제였다. 새 가수의 첫 무대를 보기 위해 가게에 나와 있던 사장님이 그 장면을 봤고, 밴드는 공연을 마치고 남아 사장님과 면담을 했다. 그리고 오늘, 민해경이 휩쓸고 지나간 무대 후 발라드를 주로 부르는 여가수 타임도 지난 새벽 한 시, 그들의 두 번째 공연이 시작됐다.

오늘은 신청곡이 없길 바랐건만, 어김없이 벨을 누르고 종이와 펜을 가져다 달라는 손님들의 요청에 괜히 내 입이 바싹 말랐다. 일개 알바생이 긴장을 하거나 말거나, 그들은 또 들국화와 송골매의 노래를 열심히 불렀다. 오디션 곡이었던 ‘행진’의 사운드가 가게를 꽉 채울 무렵, 나는 서너 장의 신청곡 종이를 무대 위로 건네주었다. 보컬은 골똘히 신청곡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다른 멤버들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됐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김광석의 ‘일어나’였다. 오늘도 나와 있었던 사장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다음 주부터는 저 밴드의 무대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 노래가 좋았다. 남이 불러달라는 노래 대신 자기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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