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실험이 나에게 준 12만 원

2013.11.19

2013년 11월 19일 날씨 흐림
외국 나와 살면서 가장 서러울 때는 아플 때라고 했던가. 역시 그랬다. 원래도 약한 나의 기관지는 냉장고 같은 공장을 견디지 못했고, 난 결국 지난 주말 앓아눕고 말았다. 일한 첫 주부터 서서히 쉬어가던 목은 거의 바람 소리만 날 지경이 되었고, 기침이 한 번 터지면 눈물이 맺힐 때까지 콜록거려야 했다. 일주일 내내 주말만 기다리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다니,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브리즈번에 온 뒤 처음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에 묘한 안정감도 들었다. 한국에서 난 마감을 하지 않고 있어도 계속 일이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공장 일은 작업복을 벗은 순간부터는 일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 그게 이 일의 가장 큰 장점이다.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볼 때면, 해방감이 느껴질 정도다. 일하는 중에는 공장의 워커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누군가는 주말 동안 클럽 DJ가 되고, 또 누군가는 매주 주말여행을 간다. 닭이 뒤집혀 포장됐다거나, 다음 주 물량을 위해 회의하자는 전화를 받을 일이 없는 것이다. 약을 먹고 하루 종일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그런 삶의 좋은 점을 생각해보았다. 아프지만 아프지 않았다.

2008년, 가을 “임상실험이 나에게 준 12만 원”
문자는 간결했다. “XXXX 임상실험이 취소되었습니다.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같은 번호로 도착해 있는 다른 문자를 찾아보았다. “XXXX 임상실험 대상자. 오전 10:30. 신촌○○○○ ○○센터 2층” 열흘 전에 왔던 문자다.

알바 자리가 필요하다고 노래하는 나에게 아는 간호사 언니가 조심스럽게 알려준 정보는 임상실험 알바였다. 설명을 들었지만 사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는 어떤 약을 실험하는 것으로, 신체검사를 통과하고 나면 몇 번 피를 뽑고 입원을 해서 몸의 변화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인체 실험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는데, 어감이 이상하니까 그냥 임상실험 대상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자. 한 번 실험 과정 전체를 거치고 나면 100만 원이 넘는 돈을 받는다고 하니 어찌 됐건 짧고 굵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기는 했다. 큰 대학병원에서 하는데 별일이야 있겠냐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너무 쉽게 좋다고 하자, 오히려 당황한 언니는 아주 만약에라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까 조금만 더 생각해보라고 했지만 생각해봤자 괜히 마음만 복잡할 것 같았다. “언니, 저 할래요. 할게요. 저 되게 건강해요.” 요새 눈꺼풀이 좀 떨리고, 일어날 때 어지럼증이 있고, 손이 자주 떨리기는 하는데요, 라는 말은 물론 하지 않았다.

며칠 뒤 문자가 왔고 나로서는 새벽이나 마찬가지인 아홉 시에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임상실험을 위해 왔다는 나를 대하는 간호사들의 태도는 사무적이었다. “저쪽으로 가셔서 검사하시면 돼요.” 한참 동안 돌아다니면서 검사를 받았다. 키와 몸무게를 재는 정도의 단순한 검사인 줄 알았는데 전기 충격을 주는 기계도 붙이고 피도 뽑고 했다. 뭔가 본격적이라는 생각에 다시 불안해지려고 했지만, 100만 원을 받으면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툭하면 꺼지는 노트북을 대신할 넷북을 살 수도 있고, 요가도 등록할 수 있고, 또… 내 처지에서는 되게 큰돈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또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야, 그래도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거니까. 월세를 내고, 전기세와 휴대폰 요금도 내고, 쌀과 라면을 사고, 버스 카드를 충전하는 것.

생각보다 길었던 검사를 마치고 앞으로 진행될 실험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부작용에 대해서도 들었다. 긴 설명이었지만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상황에 따라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그게 아주 작은 확률이라고 해도, 그 일이 나에게 벌어질지 아닐지는 모르는 거니까. 갑자기 살이 찔 수도 있고, 혈압이 오를 수도 있고, 어지럼증이 생길 수도 있고, 발진이 날 수도 있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 인생도 그렇잖아.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지만, 또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괜찮아. 난 스스로에게 말하며 의사가 내민 용지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알바 정신으로 언제나 들고 다니는 통장 사본을 내밀었다. 입금은 여기. 그럼 다음 검사 때 뵙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온 게 지난주. 그리고 한 주가 지난 오늘, 실험 자체가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100만 원이 날아간 것인데 아쉽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사실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1차 진행 비용 120,000원이 입금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100만 원 대신 12만 원으로 할 일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이제 엄마에게 전화해 이런 일을 하려고 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취소되었으니까. 이제 부작용은 없을 테니까.

윤이나
4대 보험 혜택을 받지 않는 일만 하면서도 서른 너머까지 용케 살아남아 있는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 현재는 브리즈번의 외국인 노동자. ‘장당 만 원 대신, 시급 16,000원!’을 외치며 남반구까지 왔다. 여기서 번 돈으로 리오넬 메시를 보러 바르셀로나에 가는 것이 목표지만, 인생이 계획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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