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빼로 아가씨의 일기

2013.11.12

2013년 11월 12일 날씨 비
호주에 간다고 하자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겁을 주었다. 호주에서 1년이면 8kg, 10kg 살이 찌는 건 기본이라고. 특히 음식이 대부분 달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칼로리가 상당히 높아서 여자들이 급격하게 살찌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호주에서 10kg이 쪄서 돌아왔더니 공항에 마중 나온 아빠가 짐도 들어주지 않더라, 하는 식의 경험담을 들으며 난 각오를 다졌다. 찌는 게 웬 말이냐, 반드시 빼서 오리라. 반평생 다이어터로서 버릇처럼 다이어트 선언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브리즈번 생활 150일을 맞이하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각오를 잘 지켜가며 살고 있다. 꽂히는 순간 중독의 길로 간다는 악마의 과자 팀탐도 안 먹고,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겠다며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마켓에서 과일과 채소도 산다. 하지만 공장에서 저녁으로 먹기 편한 컵라면의 유혹, 그리고 닭을 뒤집고 포장하다가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갈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단 거, 더 단 거’에 대한 유혹을 이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새는 닭 냄새도 맡기 싫은데 찰리와 함께 초콜릿 공장에서 일한다면 초콜릿이 싫어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빼빼로데이였구나. 내일은 출근길에 한인 마트에 들러 빼빼로나 사 갈까.

2006년, 늦가을 “빼빼로 아가씨의 일기”
오랜만에 이벤트 도우미 일을 하게 됐다. 연인들의 날이 없었다면 내 알바 자리도 명맥이 끊겼을 터. 상술이 어떻고 해도 대한민국 내수를 증진시키는 건 다 연인들의 몫인 것이다. 이번엔 빼빼로데이. 11월 11일이 토요일이라 목요일과 금요일, 토요일 사흘만 오후에서 저녁 늦은 시간까지 바짝 팔면 된다. 마트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회사와 상가가 밀집된 지역의 편의점 앞 매대에서 판매하는 거라 11월이 되자마자 들이닥친 추위가 좀 걱정이긴 했지만, 사흘인데 뭐 별일 있겠나 싶었다. 짧은 치마를 입어야 하고 검정 스타킹을 신으면 안 돼서 걱정이었지만, 그래도 나에겐 무적의 발토시가 있다. 흉해 보이기만 했던 발토시지만 이제 보온을 위해 꼭 필요하니, 역시 모든 건 나름대로의 쓸모가 있는 법이다.

이번에는 밖에서 일해서 그런지 8.0(8만 원)을 받는다. 24만 원을 받고 나면 또 근근이 살아질 것이다. 졸업까지 하고 나니 나갈 데가 없어서 차비 정도밖에는 들지 않으니 괜찮다. 뭔가 어머니들이 소일을 하면서 차비나 버는 거지, 하고 말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목요일이었던 어제는 별로 장사가 되지 않았다. 굳이 포장을 해서 거창하게 선물하는 게 오히려 어색한 과자니까, 이해는 된다. 나라도 빼빼로 같은 건 그냥 한 상자 사서 건네고 말 것 같았다. 물론 줄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나에게. “내일은 아마 잘될 거예요. 여기는 다 회사라서 금요일이 피크예요. 오히려 주말에 장사가 더 안되거든.” 어제 퇴근하며 오늘은 별로 사람이 없더라고 선수 쳐서 말했더니, 점장이 대답했다. 존댓말과 반말이 미묘하게 섞인 말투가 거슬렸지만, 내일은 더 잘 팔아야겠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마음에 없는 미소를 지어야 하는 날들이 앞으로 더 많아지겠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오늘. 금요일이 왔다. 점심시간 직전에 출근했는데, 점심을 먹으러 몰려나온 회사원들이 꽤 많이 빼빼로를 사 갔다. 하긴 회사 동료들끼리 간식으로 나눠 먹으면서 내일이 빼빼로데이네요, 같은 말들을 의미 없이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확실히 날이 추워져서 치마와 토시 사이, 얇은 스타킹으로만 가려진 살로 닿는 바람이 차가웠다. 저녁이 되자 거의 이빨이 부딪힐 정도로 추워졌지만, 장사는 어제의 세 배는 잘됐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솔에서 라 정도의 음으로 “빼빼로데이를 준비하세요! 사랑을 전하세요!”를 외쳤다. 저녁은 삼각김밥으로 먹었다. 퇴근 시간에 한차례 폭풍처럼 지나간 손님 덕에 매출이 무색하지 않은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내 눈에는 엄청 촌스러운 묶음 포장에 리본을 단 빼빼로 세트를 회사원들은 척척 사 들고 갔다. 만 원이 넘어가는 세트를 몇 개 연속으로 팔자, 점장이 나와서는 뜨거운 캔커피를 쥐여주며 조금만 더 고생하라고 말했다. 두 시간만 더 팔자. 캔커피를 허벅지에 문지르자 조금 나았다.

마지막 한 시간 동안은 취객들이 대부분이었다. 금요일에는 회식들을 하자고 다 약속이라도 했는지 퇴근한 회사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주변의 삼겹살집이나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일찌감치 1차를 마쳐 어중간하게 취한 회사원들에게 빼빼로를 흔들면 흔쾌히 샀다. 문제의 아저씨가 “이봐 빼빼로 아가씨!” 하고 소리 지르며 다가온 건, 퇴근 시간을 15분도 안 남겼을 때였다. 호기로운 척 가장 큰 세트 가격을 물으며 자꾸 손을 만지려 하고 옆에 붙는데, 폭탄주라도 말아 드신 건지 이미 냄새부터 술이 그인지 그가 술인지 모를 상태인 듯했다. 몇 번 가격을 묻다 말고 뜨겁고 축축한 손이 내 허벅지 근처를 얼쩡거리기에, 손목을 잡아채고 손가락을 펴서 빼빼로 세트 손잡이를 걸어주었다. “이거 사모님 갖다 드리세요. 좋아하실 거예요.” 부장님인지 과장님인지 하는 아저씨는 껄껄 웃더니 “이 아가씨 재밌네!” 했다.

웃으려고 했지만 입이 얼어서인지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 아저씨는 그 세트 하나를 샀고, 몰고 온 직원들에게도 한 상자씩 빼빼로를 돌렸다. 그걸로 마지막 매출을 찍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거울 속에는 눈 화장이 번지고 입술이 파랗게 질린 여자가 날 보고 있었다. 윤이나 씨, 이런 데서 알바하시면 얼어 죽어요. 그런데도 아직, 하루가 더 남아 있다.

윤이나
4대 보험 혜택을 받지 않는 일만 하면서도 서른 너머까지 용케 살아남아 있는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 현재는 브리즈번의 외국인 노동자. ‘장당 만 원 대신, 시급 16,000원!’을 외치며 남반구까지 왔다. 여기서 번 돈으로 리오넬 메시를 보러 바르셀로나에 가는 것이 목표지만, 인생이 계획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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