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를 든 히어로

2013.11.05

2013년 11월 5일 날씨 흐림
작년까지만 해도 늦가을이라면 역시 <슈퍼스타 K>의 계절이었다. 하지만 호주에 온 뒤로는 보던 프로그램만 따라가는 것도 버겁기 때문에 새로운 시즌을 따라갈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고 있다. 대신 때때로 일요일 저녁에 하는 호주 < X Factor >를 본다. 호주 TV를 하루만 틀어놓고 있으면 이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데, < X Factor > 역시 호주인 하우스메이트가 광팬이라 늘 틀어두어서 보게 됐다. 그가 응원하는 참가자는 다미 임이라는 한국인 이민자로, 브리즈번 출신이기도 하다. 그녀는 최종 3인까지 올라갔고, 지난주에 그랜드 파이널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시간에 맞춰 모든 셰어생들이 함께 모여 그랜드 파이널을 지켜봤다. 누군가와 TV를 같이 볼 때면 늘 그렇듯이 온갖 품평이 오가는 가운데, 우리의 다미가 등장했다. 스타일이 별로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동양인 화장을 처음 해보는 게 틀림없네, 하는 수다가 오고 가다 반주가 흘러나오는 순간 다들 조용해졌다. 그녀가 오디션의 첫 곡으로 불렀던 머라이어 캐리의 ‘Hero’였다. 우스꽝스러운 메이크업이 보이지 않게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거기에 영웅이 있죠.

2003년, 초여름 “올림픽공원의 영웅들”
머라이어 캐리에 대해 아는 것이라면, 역시 ‘Hero’다. 실은 그것 말고는 아는 게 없다. 그러니 세계적인 디바의 내한 공연이니 뭐니 해봤자,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같이 신방과 수업을 듣는 선배 한 명이 “이나야, 너 올림픽공원 가까이 산다고 하지 않았어?”라고 묻기 전까지는. 버스 한 번이면 가죠. 선배는 나의 대답에 반색을 하면서, 그러면 이번 주에 알바 자리 하나가 있는데 어렵지 않으니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알바라니, 당연히 고맙습니다. 과외는 주말 낮으로 시간을 조정하면 되니까요.

“시급이 아니고, 하루 일당으로 줄 거야. 끝나면 바로 줄게. 생각보다 일찍 끝날 수도 있어.” 끝나면 바로. 일당. 좋은 단어들이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나를 보며, 선배가 친구 한 명을 데려와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냥 꽃 포장하는 일이니까, 떠들면서 할 수도 있고. 근데 금요일 한낮에 왜 공원에서 꽃 포장을 하나요?

선배의 설명은 이랬다. 원래 머라이어 캐리의 콘서트에서는 앵콜곡을 부를 때 모든 관객들이 해바라기를 들고 흔드는 게 일종의 문화라고. 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 그렇게 하는데, 이걸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그 사실을 알리면서 해바라기를 팔 거라고. 이미 머라이어 캐리 한국 팬클럽과도 다 얘기가 됐으니 독점이나 마찬가지지, 새벽 꽃시장에서 떼어오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너랑 네 친구는 해바라기를 비닐로 개별 포장하기만 하면 돼.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화 충격이 왔다. 풍선이 아니라 해바라기라니! 꽃의 종류는 풍선 색보다 훨씬 많으니까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의 팬들이 꽃의 색이 겹친다고 싸우거나 할 일은 없겠군. 게다가 반드시 우비를 입고 흔들어야 할 것 같은 풍선과는 달리 뭔가 낭만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대망의 디데이가 왔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열린음악회 알바 동료이기도 한 친구와 함께 올림픽공원에 도착한 게 아홉 시. 잔디 공원 근처 벤치가 있는 정자에는 이미 해바라기가 가득 쌓여 있었다. 스페인 어딘가에 있다는 해바라기밭에 가지 않는 한, 평생 못 볼 해바라기였다. 일은 단순했다. 셀로판지를 옆에 쌓아두고, 해바라기를 포장한다. 한 번에 하나씩. 선배와 선배의 친구는 상자에 그걸 옮겨 담아 어딘가로 날랐다. 사람들이 슬슬 도착할 다섯 시 정도부터 판다고 했으니까 그 전에는 모두 포장을 마쳐야 했다. 그냥 눈대중으로 보더라도 쉬지 않고 1분에 두 개씩은 포장해야 시간 전에 일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꽃 포장이니 떠들고 음악 들으면서 여유롭게 할 수 있을 거라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건 뭐, 거의 공장 수준이네. 셀로판지 위에 해바라기를 놓고 착착 접어 아래쪽을 호일로 싸는 단순한 일을 몇 시간째 반복하자 허리도 아프고 눈이 빠질 것만 같았다. 김밥을 점심으로 먹고 나서 또 착착착. 물 한 번 마시고 또 착착.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 100’ CD에서 추출한 머라이어 캐리 노래도 MP3 플레이어에 넣어왔는데. 100위 안에 세 곡이나 있다니 과연 팝의 디바답지 않은가 말이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해바라기 산이 언덕 정도로 낮아지고 마침내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자, 한 삽씩 퍼서 산을 옮겼다는 우공이라는 할아버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마지막 해바라기까지 포장을 마쳤을 때, 선배는 수고했다며 나와 친구에게 일당을 주었다. 역시, 끝나고 바로.

“선배는 이제 꽃 팔러 가는 거예요?”
“응. 다 팔고 나면 나도 콘서트 보러 들어가야지.”
드라마 피디가 되려면 여러 가지 문화생활을 경험하는 게 중요하거든. 아, 그렇구나. 중요하구나. 엄청 비싼 내한 공연도 보고, 직접 사업도 시도해보고. 내가 예능 피디가 되려면, 이렇게 마냥 알바만 하면 안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지우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한 손에는 5만 원, 한 손에는 해바라기 한 송이. 귀에는 라이브로 듣지 못할 머라이어 캐리의 목소리. 견뎌요. 내일이 있으니까. 내일은 길을 찾게 될 거예요. 당신 안에 영웅이 있죠.

윤이나
4대 보험 혜택을 받지 않는 일만 하면서도 서른 너머까지 용케 살아남아 있는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 현재는 브리즈번의 외국인 노동자. ‘장당 만 원 대신, 시급 16,000원!’을 외치며 남반구까지 왔다. 여기서 번 돈으로 리오넬 메시를 보러 바르셀로나에 가는 것이 목표지만, 인생이 계획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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